다행히 연이은 발작은 막았고 퇴원도 했지만 진짜문제는 퇴원한 후에 시작되었다. 24시간 이상 발작을 하면서 다리 근육이 다 빠져버린 것인지 한별이는 제대로 걷지도 앉지도 못했다. 게다가 시력도 잃었기에 물이 어디에 있는지 밥이 어디에 있는지 더듬거리거나 후각을 이용해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밥그릇이나 물그릇을 뒤엎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저기 부딪치고 넘어지기 일쑤였다. 조금이라도 높이가 있는 곳에 올려놓으면 공간감각이 없는 건지 그냥 앞으로 꼬꾸라졌다. 꼭 화장실에서만 용변을 보던 한별이는 이제 아무 곳에서나 마려우면 대소변을 싸기 시작했다.
갑자기 변해버린 환경이 혼란스러운 한별이는 계속해서 일어나려고 했다. 오랜 시간 발작을 하면서 균형감각에 이상이 생겨 버렸는지 힘없는 다리로 지탱하고 서서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기만 했다. 그러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를 밤새 반복했다. 일어서면 다칠까 봐 한별이를 안고 잠을 청해보려 했지만 빨리 회복하고 싶은 건지 잠도 자지 않고 자꾸만 일어섰다.
그래도 우리와 함께 있는 시간에 한별이를 보살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다 출근하고 난 뒤 한별이가 혼자 있는 시간이었다. 당분간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산책도 못하고 쿠션 위에 앉아있어야만 했기에 한별이의 대소변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난감했다. 고민 끝에 우리는 한별이와 같이 있는 시간에는 기저귀를 채우고 거실에 울타리를 하고 쿠션을 깔아 다치지 않게 관찰했다. 그러나 우리가 출근했을 때는 다칠 위험이 높고 기저귀가 벗겨질 수도 있기에 화장실에 한별이를 넣어두는 방법을 선택했다. 한별이가 잘 보이도록 카메라를 설치하고 여러 개의 물그릇과 쿠션을 깔고 불을 켜두었다. 한별이가 화장실에 있으면 카메라로 모두 관찰할 수 있었고 기저귀가 벗겨지거나 물그릇을 쏟을 걱정을 안 해도 되니까. 처음에는 화장실에 가둬놓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안 좋았지만 그 방법만이 우리가 함께 안전하게 살아갈 방법이었다.
다행히 나의 직장과 집이 많이 가까웠기에 점심시간에도 집에 와서 한별이를 보살필수 있었다. 그렇게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한별이를 보살피던 나의 노력을 알았을까. 퇴원 후 2주 정도 지나자 한별이는 조금씩 시력을 회복하고 다리에 힘도 생기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활발한 꼬리의 움직임이나 표정은 없어졌지만 나와 조금씩 눈을 마주쳤다.
얼마 후 처방받은 약을 다 먹어서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담당선생님은 그동안 별일이 없었는지 심박동도 체크하고 기본적인 검사도 해주셨다.
"다행히 시력은 조금 돌아왔네요. 심박동도 괜찮아요."
"혹시 여기서 노력하면 조금 더 좋아질 수 있을까요?"
"글쎄요. 여기서 더 좋아지긴 힘들 거 같아요. 이제는 스테로이드를 줄이는 것도 너무 위험해서 이대로 계속 고용량으로 쭉 복용해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스테로이드를 오래 먹으면 다른 장기가 망가지잖아요?"
"네. 어쩌면 다른 장기들이 먼저 망가지거나 발작을 계속하거나 둘 중 하나라서... 잘 아시다시피 이제는 다른 방법이..... 딱히 없습니다"
머리로는 이미 수십 번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선생님은 다시 한번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확인시켜 주셨다. 아는 답변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번 다시 매달리며 묻는 내가 나 스스로도 답답했다. 이대로 한별이에게 스테로이드를 계속 먹이는 게 맞는 걸까. 한별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수많은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그에 반해 내가 원하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바로 한별이와 하루라도 더 함께 살아가는 것. 하지만 과연 이것이 한별이도 원하는 것일까. 독한 약을 먹으며 하루하루 버텨가는 걸 한별이가 진정으로 원할까.
언제 발작하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앞이 잘 안 보인다는 불편함. 이것을 안고 매 순간을 버티고 살아가야 하는 한별이에게 나는 너무나도 이기적인 매정한 보호자였다. 순전히 나와 남편의 욕심으로 한별이의 매일을 꾸역꾸역 붙잡고 늘어지며 반복하고 있었다. 한 달에 수십만 원을 약값으로 쓰면서 이런 기분까지 덤으로 느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비참했다.
한별이에게 독이 든 사료를 먹이는 더러운 기분으로 우리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