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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 Apr 11. 2021

기억은 신의 선물, 망각은 신의 축복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언제 그런 순간이 있었더라?'

생각보다는 기억이 많이 나지 않았다. 기억의 힘 대신 망각의 힘이 컸다. 인간에게 망각이 있어서 다행이다.


고통이 심하다는 수술인 치질 수술과 비염 수술을 한 적이 있다. 두 가지 수술을 해 본 사람은 안다. 마취에서 깨어나서 느끼는 통증은 사람을 극한까지 몰고 간다. 치질 수술 후의 배변의 고통은 끔찍하다. 비염 수술 후에 코에 가득 넣어둔 붕대를 꺼낼 때는 속살이 뜯겨 나가는 고통을 느낀다. 그때의 통증을 평생 기억한다면 끔찍한 일이다. 다행스럽게 시간이 지나면서 아픈 통증의 기억은 희미해졌다. 사람이 생존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망각의 힘이다.  


우리는 아프거나 괴로운 일을 당했을 때 그 고통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그 아픔의 상처가 치유된다. 첫 실연의 아픔을 중년이 되어서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극단적으로 아픈 기억이나 의미 있는 기억을 제외하면 서서히 희미해져 간다. 망각의 힘 덕분이다.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 푸네스라는 농부가 나온다. 그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뒤 보고 들은 것들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 좋을 것 같지만 푸네스에게는 고통이 생겼다. 쌓여가는 기억 때문에 괴로워지는 부작용이 생긴 것이다. 고통스러운 기억도 영원히 기억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망각이다.


2006년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대의 제임스 맥고프 박사 연구팀 보고에 의하면 실제로 기억력이 극단적으로 뛰어난 AJ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일생 동안 특정 날짜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날 날씨와 뉴스, 그리고 그때 느낀 감정까지 고스란히 기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슬픔과 고통을 영원이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지 상상도 안된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도 지우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다. 아내와 감정을 소비하며 다투었던 일, 최고경영층 앞에서 영어 스피치를 하다가 엉망으로 진행했던 일, 부서원 간 갈등으로 인해 팀장으로서의 리더십에 회의를 느꼈던 일 등. 지금 생각해보면 이불킥을 할 만한 일들이었다.


당시에는 죽을만한 속상하고 부끄러운 기억들이었지만 지금은 덤덤해졌다. 그때의 속상함, 분노, 절망, 미안함, 후회,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왔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의 감정들과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낀다. 


망각이라는 녀석 덕분에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꿈꾸게 된다. 기억력이 예전만 못하다면서 초조해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럴 필요가 없다. 흐려져가는 기억에 초조하고 아쉬운 마음을 갖는 대신에 신께서 나에게 준 망각이라는 선물에 감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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