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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른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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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콩콩 Aug 03. 2019

엄마가 없어서 좋은 점

독립의 장점

모처럼 일찍 귀가한 날이면 나는 게을러졌다. 일찍이라고 해봐야 9시를 훌쩍 넘길 때가 많았지만 야근을 하면 자정을 넘어 집에 오기 때문에 9시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보통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골랐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대강 던지고, 소파에 드러누어 TV를 켰다. 정말 TV를 볼 생각은 아니었다. TV도 보던 사람이나 본다. 줄거리를 모르는 드라마와 캐릭터를 모르는 예능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기’의 배경화면이었다. 내가 돌아온 소리에 방에서 나온 엄마가 외출했던 상태 그대로 소파에 엎어진 나를 보고 한 마디 했다.

“밥은 먹었어? 옷부터 갈아 입어.”
“밥 먹었어요.”

엄마는 힐끔 나를 보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채널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몇십 분쯤 보냈을까? 엄마가 화장실에 가려고 방에서 나왔다가 여태 같은 자세로 누워 있는 나를 보았다.

“아직도 그대로 있네. 옷 갈아입고 씻고 봐.”
“네에.”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물론 엄마가 볼일을 보고 나왔을 때도 나는 변함없이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너 그러다 잠든다. 씻고 개운하게 보라니까.”

이번엔 대답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나와 부엌에서 물을 마시던 엄마가 한 마디 더 붙였다.

“얘, 콩콩아, 안 일어나?”
“아! 왜에? 좀 이따가 씻으면 되잖아요? 좀 내버려둬. 내가 하고 싶을 때 할게요.”
“그러니까 어차피 씻을 거 지금 씻어.”
“아 엄마아~ 쫌~~~!!!”
“아니 얘.....”

“이 밤에 웬 큰소립니까.”

엄마가 한 마디 더 하려는데 방안에 있던 아빠의 목소리가 엄마의 말을 막았다. 엄마는 얕은 한숨을 내 쉬고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입을 삐죽이며 몸을 일으켜 ‘아무것도 하지 않기’ 모드를 종료했다.

보통은 이런 식이었다. 내가 게으름을 피울 때면 엄마 또는 엄마 아빠가 등장해 나의 나태함을 자꾸만 깨닫게 만들었다. 일주일 동안 업무에 시달리다가 토요일에 늦잠을 좀 잘라치면

엄마: (콩콩의 방문을 열고) 콩콩아, 아침 안 먹어?
나: (잠에서 못 깨어난 목소리로) 네, 안 먹어요.

10분 뒤

엄마: (부엌에서 방 넘어 목소리로) 콩콩아, 생선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어. 안 먹어?
나: (잠긴 목소리로) 안 먹어요~
엄마: 응? 뭐라고?
나: (잠긴 목을 애써 풀며 큰 소리로) 안 먹는다구-요~

5분 뒤
엄마: (다시 방문을 연 뒤) 콩콩아, 계란찜도 있는데 일어나서 먹고 자.
나: (이불을 뒤집어쓰며) 엄마 쪼옴!

아빠: (식탁에서 콩콩 들으라는 듯이) 아니 시간이 몇 신데 밥도 안 먹고 자.

아빠까지 가세하면 아직 토요일 오전 8시이지만 일어나서 식탁으로 갔다. 대체 밥을 먹고 부대껴서 어떻게 다시 자라는 건지, 먹고 자는 것과 자고 일어나 먹는 것이 뭐가 그렇게 다른지 생각하느라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밥을 먹다가 인상 쓰고 밥 먹는다고 아빠한테 한 소리 들으면 토요일 아침 루틴이 끝이 났다.

독립 후, 집에 엄마가 없어지자(?) 나는 앞서 이야기한 모든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옷부터 갈아입으라는 말과 아침 먹고 다시 자라는 말과 또 뭘 샀냐는 말과 그런 거 이미 있지 않냐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이제 미세먼지를 잔뜩 머금은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서 맘껏 구를 수 있고, 그러다가 화장도 안 지우고 잠들 수도 있으며, 허리가 아플 때까지 자다 일어나 오후 4시에 첫 끼를 먹을 수도 있고, 블랙 드레스를 몇 벌이고 옷장에 쟁일 수도 있다.

내 집에 엄마가 없고부터 나는 언제 씻고, 먹고, 잘 지를 스스로 정하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그 선택이 어른스러운지는 별개의 문제다.


#어른의일 #독립 #잔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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