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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하 Sep 19. 2023

나는 왜 글을 쓸가요? 2. 치유하려고 씁니다

쓰는 자의 일상 철학 081


1.

엄마의 하루 일과 중 가장 신성한 아침 루틴은 3권의 노트였습니다. 일일 가계부, 돈거래 장부, 서류를 담아두는 밴드가 부착된 옥스퍼드 노트. 


일일 가계부에는 하루 해야 할 일과 우리 집 소비 지출을 적어 두었습니다. 외에도 이런저런 감정이 드러난 단어로 채웠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속상했던 하루와 상황, 그때의 기분을 단어로 적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감정의 강도에 따라 색볼펜으로 밑줄이 여러 겹 그어지기도 했습니다. 엄마는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기분을 이렇게 풀었나 봅니다. 


나는 아침 등교 전 오늘의 할 일을 노트에 적었습니다. 학교 알림장과 노트를 병행했는데 주로 스프링 노트를 사용했습니다. 일하는 엄마는 학교에서 오면 해야 할 일과 나에게 심부름을 곧잘 시켰습니다. 그것을 까먹지 않으려고 적은 후 종이를 찢어서 문고리에 붙여두었습니다. 나 또한 속상한 일이 있는 날에는 교환일기 쓰듯 그 찢어놓은 종이 뒷면에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두곤 했습니다.

 


2.

학교 다니는 동안, 노트 정리 잘한다는 소리를 곧잘 들었습니다. 친구들은 나를 정리 김이라 부르며 시험 기간에는 내 노트로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결국은 나보다 좋은 성적을 받아 다시는 노트 보여주지 말자는 다짐도 하지만, 내 노트가 없으면 공부가 안된다는 친구의 애걸에 못 이겨 다시 만인의 노트가 되었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노트 필기하느라 정작 선생님 말씀은 듣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정작 수업 자체는 관심이 없었는지 모릅니다. 필기구를 사모으고 수업 시간 노트에 받아 적고 정리하고 꾸미는데 재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큰돈 들이지 않고 사부작거리는 나의 노트 정리는 가성비 갑인 취미생활이자 자체 힐링이었습니다. 또한 친구들의 학습 구세주였습니다.

 

서랍에는 책만큼 메모지와 수첩 일기장이 한가득합니다. 그동안 쓰고 모았던 것들인데 해마다 버릴까 펼쳐보고 추억에 젖어 끝내는 버리지 못하고 쌓여만 갑니다. 나는 미니멀라이프를 추구하지만 정리 정돈이 성격에 맞으니 참 잘 버립니다. 주변에서는 사람도 버릴 사람이라 놀리기도 합니다. 필요 없다면 버릴지 모릅니다. 나는 쓸모를 중요시합니다. 사용하지 않는 쓸모없는 물건은 자리만 차지하고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나를 설레게 하지 않고 기쁘게 하지 않는 물건이라면 과감히 버립니다. 그리고 버린 것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그동안 써온 수첩 한 상자를 버리고 나서 한 번 후회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버리지 못하고 쌓아 두었습니다. 나에게 메모와 일기 같은 글쓰기는 하루를 위한 계획이고 다짐이고 반성이고 기록이었습니다. 그리고 쓰는 동안 기쁨과 환희를 느꼈습니다. 그것을 버리고 난 후회한 일로 책을 남에게 주어도 다이어리와 일기장은 당분간 서랍에 쌓아둘 것 같습니다.  

 


3.

그때부터였을까요? 나만의 비밀 노트에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바라보고, 나의 행동을 반성하고, 나의 아픔과 약함을 풀어놓는 공간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 치유와 힐링의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했습니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직업으로서 글을 썼고 직장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평가를 받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그곳을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내가 글을 쓰겠다고 다시 돌아왔을 때, 처음 원고는 원고료가 없는, 대가로서 그저 밥 한 끼면 족한 취미로 쓰는 글이었습니다. 목적도 방향도 대상도 불분명한, 그냥 한번 써보자, 했습니다. 언제가 나의 약함을 드러내 치유하고 즐거움을 주었던 그때 그날처럼 말이지요. 

 


4.

다시, 확장된 쓰기를 합니다. 책을 위한 글쓰기 말이지요.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생각에서 출발하지만, 사회적으로 공적인 의미를 덧붙입니다. 감추었던 비밀을 쓰던 내가 남에게 보여주고 공감하며 힘이 되는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글은 나를 알아가는 가장 원초적인 수단이며, 그 안에서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방법이며, 결국은 나와 남이 함께 공감하고 위로하여 행복해지는 매개체입니다. 


옛날 다락방에서 썼던 비밀편지 교환일기처럼 혼자만의 즐거움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보이기로 했습니다. 공감하며 위로하고 싶습니다. 내가 나의 글을 쓰고 읽으며 울고 웃었듯이 내 글을 읽을 누군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내 글을 읽고 나 자신을 들여다보려고 그래서 나를 안아주고 싶습니다. 그 마음이 내 글을 가져간 누군가에게도 전달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자고, 그리하라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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