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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하 Sep 05. 2023

걷기 위해 걸어야 하는 이유를 찾습니다

쓰는 자의 일상 철학 067


1."거의 도착했어. 너도 집에서 출발해."


오늘 친구와 만나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기로 했습니다. 여기에 수다는 최고의 디저트며 우리 만남의 핵심이지요. 그런데 약속장소가 식당이나 카페가 아니라 집 앞 하상도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카페는 여기서 두 시간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습니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뛰거나 등산하는 것보다 트렉킹이나 산책 삼아 걷는 것을 즐깁니다. 혼자 걷는 것도 좋아하고, 친구와 둘이 걷는 것도 괜찮고, 가끔은 서너 명이 두줄로 소풍 가듯 나란히 줄지어 걷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즘 뭐가 그리 바쁜지 통 걷지를 못했습니다. 하긴 바쁜 것은 가장 그럴듯한 핑계지요. 산책보다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느라 걷는 시간도 운동할 시간도 빼앗겼습니다. 걸어갈 거리인데도 늦장을 부리는 통에 약속시간을 맞추느라 주차하기도 힘든 곳인데도 굳이 차를 이용합니다. 


2.

해서 더위가 한풀 꺾인 이번 달부터 약속장소까지 걷기를 합니다. 혼자 걸으면 심심하니까 같이 걷자 합니다. 두어 시간 수다를 떨며 걸으면 그런대로 걸을만합니다. 점심 먹고 커피를 마시면 이제 꽤가 생겨 걷기 싫어집니다. 결국 올 때는 장을 봐서 오거나 피곤함을 감추지 못하고 택시를 탑니다.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이지요. 카페에서 두어 시간을 계속 먹고 수다만 떨다 집에 오는 것보다야 낫지 싶습니다. 그래도 전체 중에서 반은 걸었으니까요. 걷겠다고 다짐한 것이니 어떤 식으로든 걸으면 됩니다. 이런저런 핑계로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반이라도 걷는 것이 낫겠지요.


걷는다는 것. 천천히 걷다가 빨리 걷다가 곧바로 걷다가 지그재그로 걷다가 어떤 형태로든 걷기는 가능합니다. 속도도 자세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렵지 않은 걷기가 시작이 어렵고 꾸준히 하기가 어렵습니다.



3.

왜 그럴까요? 숨을 헉헉거리며 전속력으로 달리라는 것도 아닌데, 마라톤 41.195km를 달리듯 장거리를 걷는 것도 아닌데, 바람 쐬며 숨 쉬며 편하게 걸으라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나는 왜 그 한 시간을 내는 것이 어려울까요? 왜 꾸준히 하지 못하는 걸까요? 집에서 현관문을 여는 것이 귀찮고, 핸드폰을 터치하면 세상 편한 구경을 할 수 있으니 편한 쪽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리고 조급함과 여유가 없으니 걷는 것보다는 차를 이용해서 순간에 빨리 닿으려고 하는 마음이 먼저인 것이지요.


달리기는 느리고 빠르고의 조절이 있지만 여하튼 속도를 두고 시간을 전제하에 도달하는데 목표를 둡니다. 그러나 걷기 또한 느리고 빠르고의 조절은 있지만 속도와 시간이 목표는 아닙니다. 


걷는 것은 순환과 여유를 부리는 것입니다. 걸으면서 하늘도 올려다보고 하천에 흐르는 물길도 살피고 길가에 핀 꽃과 마주하며 웃어주는 것이 제대로 된 걷기입니다. 그러니 걷는다는 것은 시간을 내는 일입니다. 



3.

우리는 누구보다 빠르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으로 배웠고 그렇게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누구보다 느리게 하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날 뿐입니다. 그래서 걷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속도를 내지 않고 보폭을 일정하게 주변을 살피며 걷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최근 내가 즐거이 함께 하는 동네 책방의 모임 '산책소년단'이 있습니다. 일정 중 하나가 걷기, 산책입니다. 그런데 그냥 걷기가 아니라 느리게 걷기입니다. 내가 하는 일 중 가장 어려운 일이 바로 이 느리게!입니다. 빨리빨리 세상에서 느리게는 나에게 참 어색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요즘 이 느리게를 위해 심호흡 발걸음 오감을 열어두는데 꽤 힘을 씁니다. 



4. 사는 동안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순례자입니다. 머지않아 산티아고 순례길에 서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가야지 했는데 요즘 들어 머릿속에 맴돕니다. 요란하지 않게 소리 없이 그냥 걷고 싶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걸을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은 충분합니다. 그런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걸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고 싶습니다. 삶의 이정표를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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