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용구 Dec 07. 2023

손병호 게임

나는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접어.

손병호 게임

                                        인용구


- 나는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접어

너의 말에 나는 접어야 했고

그게 쉽진 않았다


내 차례가 오면

약속하는 손모양 보여주면서

하려던 말이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난 졌더라

야속하게 사랑에 빠져서

이제 기회가 없더라


그래서 마시면서

정신을 잃도록 마시면서

뭐 이딴 게임이 다 있나, 생각했다




    요즘 친구들 손병호는 몰라도 손병호 게임은 안다. 그만큼 유명한 게임이지만 혹시 모르는 분들이 있을 테니 소개를 하면, 간단하게 말해서 그냥 손가락 접기 게임이다. 손가락 다섯 개를 펼치고, 한 명씩 돌아가며 "~~~ 한 사람 접어" 이렇게 조건을 말한다. 그 조건에 해당되는 사람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고, 그렇게 모든 손가락을 가장 먼저 접게 되는 사람이 게임을 패배, 벌칙을 수행해야 한다. 조금 찾아보니 배우 손병호가 예능 <해피 투게더>에서 소개해서 그의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조금 부럽다. 업적 아닌가(?) 손가락과 손병호, 같은 손 씨라 더 기억하기 쉬운가 싶기도 하고... (??) 나도 구인용 게임 만들고 싶은데, 왠지 그건 9명이 해야 할 것 같아 슬프다. 어떻게 친구를 8명이나 모으냐.


    아무튼 손병호 게임은 술게임으로 종종 이루어지는데, 나는 사실 '술게임'이라는 컨셉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 벌칙으로 술을 먹죠? 술은 '포상' 입니다만. 술게임을 하면 시끄럽기만 하고, 술만 빠르게 사라지고. 마셔라 부어라 취하려고 먹는 야만적인 술문화, 별로 안 좋아한다. 서로 어색한 사이에 술자리에서 쉽게 친해지는 효과는 있다고는 하는데, 그건 낯가림을 없애는 게 아니라 낯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정신을 잃게 하는 거라; 그다음 날 다시 만나면 어색하긴 매한가지다. 결국 술게임은, 술자리의 대화거리가 없어서 그 순간의 지루함과 어색함을 모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손병호 게임은 다른 술게임들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갖는다. 보통 술게임은 "박자는 생명"이라고 할 정도로 리듬감을 요구하는 게임이 많다. 딸기 게임, 후라이팬 놀이, 퐁당퐁당, 당근 게임 등등. 이게 정말 간사한 게, 술에 취할수록 박자 맞추기가 어려워져서 사실상 먹는 놈만 계속 먹게 되는, 부익부 빈익빈 구조란 말이지. 규탄할 일이다. 한편 손병호 게임은 그런 '리듬감'이 필요하지 않다. 요구되는 것은 관찰력, 순발력과 재치이다.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정보를 파악하고 나의 여집합을 아우를 수 있는, 또는 마음속으로 지목한 단 한 명 만을 걸리게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조건을 생각해야 한다. 또 어떻게 보면 손병호 게임은 모든 사람이 Yes or No로 대답하는 진실게임이기 때문에, 제법 사적인 영역으로도 들어갈 수 있는 매력적인 게임이다. 그래서 손병호 게임은 잘만 하면 아주 재밌고 서로 친해지는 데에도 효과적인 게임이지만, 막상 술자리에서는 "남자/여자 접어, 안경 낀 사람 접어" 같은 피상적인 내용만 등장하는 것이 현실. 조건 생각하느라고 좀 오래 고민하면 텐션 가라앉는다고 별로 안 좋아하는 애들 때문에 그런 듯하다. 풋내기 야만인들... 한 줄로 세워서 그냥 너 한잔 나 한잔 맞다이 뜨고 싶음.



    위의 시는 이러한 손병호 게임의 배경을 알아야 해석이 된다. 조금 더 상황 설명을 하면, 손병호 게임 중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는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접어" 라는 말을 하면서 본인의 손가락을 접는 것을 보고, 손가락과 함께 마음도 접어야 했던 거지. 그렇구나, 너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구나. 그 상황에 취하는 액션과 상황이 어떤 단념과 닮아있었다. "취하는" 상황. ㅋㅋ


    손가락이 하나만 남아 새끼손가락만 펼친 모습이 약속하는 손모양과 닮다. 내가 하려던 말은, 사실 약속이었거든. 사실 사랑 고백은 네가 허락만 하면 너만을 좋아하겠다는 약속이니까. 아 물론 게임 중에 갑자기 고백을 하겠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네가 선수를 치는 바람에 암튼 나는 준비한 말을 할 기회도 없게 됐네... 재미없다, 술이나 줘라. -> 약간 요런 느낌.


    내 글을 많이 읽어본 사람은 지겹도록 봤겠지만, 나는 시에 중의적인 표현을 자주 쓰는 편이다. 단어가 갖는 여러 뜻을 활용해서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말이 되게 하는 걸 되게 좋아한다. 표현에 또 다른 뜻이 있는데, 그것이 원래의 해석과도 잘 어울리게 하는 거, 이게 쉬운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 시에서는 동음이의어를 거의 쓰지 않고 상황만으로 그 중의성을 만든 것 같아서 마음에 든다. ('손가락을 접다'와 '마음을 접다'가 다른 뜻으로 쓰이긴 했다.)


    사실 또 사소한 부분이라 눈치를 못 채도 상관은 없는 내용이긴 한데, 단어나 표현을 고를 때도 나는 비슷한 발음을 활용해서 말맛을 살려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약속하는 <-> 야속하게, 졌더라 <-> 빠져서. 뭐 이런 거. 정신을 차려보니 <-> 정신을 잃도록, 이런 반복과 대비를 넣는 것도 살짝의 디테일. 이런 게 너무 자연스럽고 사소한 부분이라 강조하긴 민망하지만 소리 내서 읽고 하면 제법 매끄럽게 입안에서 구르는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설래(雪來)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