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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May 15. 2021

가을 끝

다시 푸른 잎을 피워내기를

가을 끝

                         인용구

여름 내내 벌레가 울었다

철없이 노래하는 새들을 피해
벌레는 밤을 기다려 울고는 했다  


상록수를 꿈꿨던 나무는

노을을 담아 위로를 건넸으나
벌레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체념. 벌레는 밤새 울었고
나무는 말없이 마른 잎을 흘렸다
내려놓은 단풍은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겨울이 올 것이다

벌레 울음 없는

헐벗은 겨울


나무는 겨울을 견디기로 다짐한다

다시 푸른 잎을 피워내기를

피워낼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상처는 나을 수 있지만 어떤 흉터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지켜질 수 없는 맹세가 있고, 결국 이룰 수 없는 희망이 있다. 어떤 위로로도 해결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 나는 그런 어쩔 수 없는 일들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던 것 같다. 불행한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당신의 깊은 외로움을, 나는 위로해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당신이 편안해지기를 희망하면서 그때까지 당신을 흔들림 없이 사랑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당신을 바꾸고 싶었다. 그 사람이 몸을 담근 그림자 속에서 그를 끌어내고 싶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당신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변화하는 것은 내 쪽이었다. 그 사람과 함께하면서 나는 알지 못했던 세계를 만났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내게 얘기할 때마다 나는 대신 미안해했고, 그의 분노와 비관에 어느 순간부터는 더 크게 공감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어떤 뮤지션을 좋아하게 됐고, 가보지 않은 곳들을 처음 가보았다. 그 사람도 나에게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함께하며 우리는 자주 웃었고, 남들 다하는 유치하고 시시한 일들도 세상 즐겁게 했다. 내가 그 사람을 더 밝게 만든 것 같아서 기뻤다.

 그러다 어느 날은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옛날 자살 시도를 했었다는 이야기였는데, 여전히 가끔씩 그런 충동이 든다는 말을 듣는데 순간 눈앞이 흐려지며 이 사람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아마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그 사람도 느꼈으리라. "넌 절대 이해 못하겠지"라며 내게 벽을 세우는 모습에서 결국 나도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그를 위해서 변화했던 모습들이, 노력들이 다 무색해지는 것 같았다. 온통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아마 너를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라는 말과 함께 나는 그를 내팽개쳤다. 그 사람은 내게 한동안 매달렸는데, 나는 그것도 조금 의외였지만 모질게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래, 세상에는 그렇게 울음을 그칠 수 없는 벌레 같은 사람이 있어,' 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사람에게 물든 나의 모습들을 발견할 때마다 입에서는 쓴맛이 났고 그가 마구 원망스러웠다. '다시 그 사람 이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야지, 마냥 푸른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도 추억으로 보정되었고, 나는 그에게 영향받은 나의 모습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도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사랑했다는 증거였어. 나는 할 만큼 한 거야, 잘한 거야, ' 라면서 말이다. 나의 문제를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도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나의 문제는 처음부터 있었다. "나는 당신을 바꾸고 싶었다"면서. 그것부터가 오만이었다. 지는 얼마나 잘났다고, 나는 누군가의 구원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당신을 '해결'의 대상으로 보았고, 그게 잘 안되니까 포기해버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 사람이 '넌 절대 이해 못 하겠지'라고 생각할 여지를 계속 주었으리라.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던 일들마저 그가 극복해야 하는 숙제처럼 두고, 계속 '다르게 생각해보자, 이건 태도의 문제야, 네가 그 시련과 화해를 해야 해,' 따위의  말로 그를 괴롭혔다. 변명하자면 내게 악의는 없었다. 그가 내게 고마워하며, 나에게 의존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 아냐, 그것도 바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내가 그를 가스라이팅하고 있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 사람의 행복을 빌었다. 그가 나와 무관해진 후에도 그가 평화를 찾기를 바랐다.

 그 사람이 음지에 있다는, 그에서 끌어내야 한다는 오만한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저 그 사람 옆에 있어주기만 할 걸 그랬다. 그 사람이 "넌 절대 이해 못하겠지"라고 내게 비수를 꽂아도 "그래, 나는 아마 너를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야"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계속 노력해볼게. 그러지 못하더라도 계속 네 곁에 있게."라고 덧붙여줄 걸 그랬다. 그의 괴로움에 서투른 공감이나 조언을 건네지 말고 그저 "힘들었겠구나," 라며 어깨를 내주었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사람의 구원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내게 마지막 순간 매달렸다는 것은, (어쩌면 성공적인 가스라이팅의 결과였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그의 굳게 닫혀있는 것 같아 보이는 마음속에, 내가 없는 게 아니었다. 그것을 모질게 밀쳐내면서 나는 오히려 그를 더 깊은 외로움으로 몰아세웠다. 잠시지만 나와 공유했던 희망을 짓밟고 사람에 대한 더 큰 불신을 심어버린 것이다. 그것에 대한 깊은 미안함이 있다.

 그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인연을 바로잡을 수 있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끼리끼리 만났던 거야. '흔들림 없는 사랑' 같은 것을 입에 담을 정도로 그때 나는 철이 없었다. 그 사람도 그것을 내게 기대해서는 안 됐고. 나는 절대 상록수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는 나보다 불안정한 사람에게 평화를 제공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도 아니고, 돌이켜봐도 그는 나를 좀먹는 사람임은 분명했다. 진부하지만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란다. 요즘 나는 벌레 우는 밤이 아닌, 새가 재잘대는 낮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떤 밤은 아직도 너의 소리가 선명하지만, 나는 이제 내 안에 둥지 튼 새의 노래를 들으며 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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