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했다고, 한 번만 말해주오.
인용구
형,
나 비록 당신에게 한 번도
밝은 모습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대 저묾으로 물들였던 이 골목
형 없는 동안은 내가 지키기로 했소
술 취한 사내, 집 없는 고양이,
사랑을 하며 서성이는 청년에게
밤길 중의 빛 그늘로 있어 주려 나
형의 기억으로 힘냈소 그들 그림자
내 아래에선 세상 어둠 묻지 않았소
나 노력했지만 여전히 키가 작은 탓에
형처럼 많은 존재에 닿지는 못했으나
삶이 있는 이 동네 한구석에 뿌리내려
보다 가까이서 그들을 보살피려 하오
형의 모습 늘 떠올리며 전달하려 하오
그러니 다시 만날 내일 오거든
형, 칭찬 한마디 해주겠소
고생했다는 말은 필요 없고
찬란했다고, 한 번만 말해주오
형
<천원돌파 그렌라간>이라는 애니메이션 작품을 넷플릭스에서 보았다. 지상을 점령한 수인(獸人)들을 피해 인간은 지하에 숨어 사는 세계, "땅파개" 시몬이 그가 의형 "그렌단의 두목" 카미나를 따라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총 27화라는 짧은 서사 동안 지하에서 지상을 거쳐, 성단과 은하를 초월하는 스케일로 발전하며 말 그대로 "천원돌파"하며 끝을 맺은다. 이렇게 시놉시스를 적으니 스토리가 우주로 가버리는 괴작(?) 같지만, "나선력"이라는 흥미로운 설정으로도 표현되는 인류의 위(=희망, 미래)를 향한 갈망, 거침없는 진보의 의지라는 극의 주제와 과감한 전개가 제법 잘 어울린다고도 평가하고 싶다. 그로 인한 호불호도 많이 갈린다고는 하던데 나에게는 가슴이 웅장해지는 웰메이드 열혈 소년만화로 다가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천원돌파 그렌라간>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극의 가장 큰 스포일러 중 하나이기도 한데, 바로 아래의 장면이다. (스포일러라 해놓고 바로 소개하는 게 조금 조심스럽습니다만, "Story Spoilers Don’t Spoil Stories (2011)"라는 논문에 따르면 스포일러가 꼭 나쁜 건 아니라고... 합니다.)
주인공 시몬이 가장 의지하고 동경했던 형 (아니키, 兄貴) 카미나는 극의 중반부에 죽는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폐인이 되었던 시몬이 일순간 각성하는 위의 장면은 수많은 패러디로 재생산되기도 했다.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캐릭터 "럼블"의 인기 스킨, "슈퍼 갤럭시 럼블"의 컨셉과 대사도 그렌라간을 오마주 했다고.
카미나는 <천원돌파 그렌라간>의 초중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로, 극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인정하는 멋진 사나이의 포지션을 맡고 있다. 나는 열혈 쾌남을 이해하는 인간은 못 되어서 솔직히 카미나가 조금 무모하다고, 자신감만 가득해서 허풍쟁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너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면, 나를 믿어. 너를 믿는 나를 믿어." 라는 대사는 솔직히 좀 멋있었다. 왜 시몬이 카미나를 그토록 따랐는지는 이해가 되더라. 죽음 후에 카미나의 삶을 가만히 되짚어보면, 그는 허풍쟁이가 아니고 정말 자신의 말을 모두 관철해낸 '사나이'였다.
그러나 이 만화에서 내 가슴을 뜨거워지게 만든 인물은 카미나가 아닌 시몬이었다. 형을 졸졸 따라다니던 소심한 찌질이, 자신을 믿지 못한 탓에 소중한 사람을 잃기도 했던 그가 각성하여 사나이로 거듭나는 장면은 진짜 오타쿠 가슴에 불을 지폈다고. 그렌단의 리더가 되고 점점 그를 따르는 사람이 늘어나는 동안에도,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카미나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 시몬의 모습은 참... 주인공 같았다.
"형. 난 형처럼 될 수는 없지만,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오겠어. 땅파개 시몬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만화 속 주인공 같은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으나, 나에게도 "카미나"처럼 좋아하던 형들이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냥 사촌 형아들이 놀아주는 게 참 기뻤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형들을 '형아'라고 불렀다.)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센 형이랑 막대기 하나 들고 동네를 활보할 때면, 나한테 까불던 애들 다 불러와서 형 앞에 세워놓고 표정 구경을 하고 싶었다. 한때는 역사 속 위인들 보다도 그들이 나의 롤모델이었으니, 형이란 참 신기한 존재이다. 선생님, 부모님처럼 '어른'이었으면 좀 거리감이 들었을 것 같은데, 나랑 닮아서 말도 잘 통하는데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세고 똑똑한 존재라니. 나의 작은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건 친형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친형 있는 애들은 자기 형 생각하면 되게 분해(?)하더라고.)
물론 그런 막연한 동경은 학창 시절을 보내며 잠시 사그라들었으나, 대학에 와서 만난 "선배"란 존재는 막 성인이 된 나에겐 다시 우상처럼 다가왔다. 수업도 많이 듣고 동아리 활동도 바쁜데, 모든 일을 혼자 해내면서 주변 사람들까지 웃으며 챙기는 회장 선배는 정말 멋있었다. 한편으론 나보다 한두 살 밖에 많지 않은 형이 지고 있는 부담감이 안쓰러워서 더 마음이 많이 갔던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은막과 해동검도, 문학의 뜨락. 동아리마다 생각나는 선배가 하나씩은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참 형들을 많이 좋아했다.
청춘만화 같았던 장면들도 간간히 만들면서, 나의 대학생활도 쉼없이 흘러 어느새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그래서였을까, 죽은 카미나한테 말을 걸던 시몬의 마음이 나는 이해가 됐다. 동아리 회장을 하면서, 또 고참 선배가 되면서 가끔 군대에 간, 졸업한 선배들이 생각날 때가 있었다. 형도 이렇게 힘들고 외로웠는지. 형은 무슨 마음으로 후배들한테 잘해준 건지.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동생들을 보며 나는 형한테 배운 대로만 하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을 때가 아직도 가끔 있다.
글은 그런 마음을 담아 오랜만에 형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나 당신 떠난 자리에서 이제 형의 위치가 되었다고. 형처럼 멋진 선배가 되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래도 내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해 형을 닮고 있다고. 그런 소재의 글을 "형 광 팬"처럼 "태양 광 가로등"에 대입해서 써보았다.
사실 친구랑 "1일1풍경"이라는 페이지를 운영하는데, 친구가 풍경 사진을 보내주면 내가 그것에 어울리는 글을 한 줄 지어주는 식으로 참여하고 있다. 근데 이 친구가 며칠 연달아 가로등 사진만 보내주길래 할 말이 떨어져서 가로등을 생각하다보니, '태양은 맨날 가로등이 꺼져있는 모습만 보겠네'라는 생각이랑 '가로등은 빛으로 된 그늘을 만드는 존재'라는 발상이 떠올라서 그걸 시에도 넣었다.
아, "그대 저묾으로 물들였던 이 골목"의 '저묾'을 '젊음'으로도 읽을 수 있도록 썼는데 이거 눈치채주면 고맙겠다. 개인적으로 글에 너무 '형'이란 말이 많이 등장해서 약간 변태같다(...)는 생각도 살짝 들었는데, 그냥 애틋하게도 읽히는 것 같아서 굳이 의식해서 수정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형, 멀리서도 항상 잘 지내시고요. 다음에 만나면 술이나 사주세요. 다음에 또 안부 전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