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와 설거지의 역학관계
맞벌이를 하는 저희 부부는 저녁 한 끼 같이 먹는 게 하루의 피로를 푸는 힐링의 시간입니다.
특히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점심과 저녁 그리고 가끔은 일요일 식사까지 꽤 잘 챙겨 먹습니다. 아내는 빵을 좋아해서 빵순이라 가끔 놀리곤 하는데 가정집에서는 비싸서 장만하기 조금 부담되는 오븐기를 몇 해전에 장만했더랬죠.
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설거지거리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껏 도마 두어 개와 반죽과 숙성에 쓰인 큰 볼 그릇정도이니까요.
빵과 잘 어울린다면서 스파게티를 해도 그릇 몇 개 정도 추가되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딸들이 주말에 집에 오거나, 하루 세끼 다 챙겨 먹는 날이면 아까 얘기한 분량이 매 끼니마다 나오니 곱하기를 하면 적지 않은 설거지 노동이 됩니다.
식기세척기가 있으나 요 녀석을 믿지 못하는 건 아내나 저나 매한가지입니다. 전용 라면 보관함으로 용도변경된 지 한참 되었고, 오로지 손수 세척을 해야 믿음이 생기고 그제야 마음이 편한 걸요.
딸들이 있는 주말이면 그간 못 먹어서 생긴 '본가 향수병'을 풀어줘야 하니 마라탕, 떡볶이, 각종 고기 요리, 해산물 등으로 배고픔을 달래줍니다.
이런 와중에 제 걱정은 한숨으로 새어 나오죠. '아~ 정말 장난 아니네'
저보다 인생선배이신 남편분들께서는 나름의 노하우가 있으시겠지만 제 방법은 약간의 잔머리를 굴려서 만든 치트키가 있습니다.
여기서 살짝 오픈합니다만... 아내가 이 글을 읽는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조금 걱정이 되네요.
우선 오늘이 금요일 저녁이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전부터 딸들의 일정이 확인되면 퇴근 때 먹거리 쇼핑을 위해 집 근처 마트나 쿠팡프레쉬로 준비를 합니다.
아내가 앞치마를 두르면 저도 오른편에 서서 음식 준비 중에 발생하는 그릇들을 즉시 설거지 해버립니다.
간혹 아직 더 사용해야 하는 칼이나 그릇을 설거지 해버리는 실수가 있으나 아내는 크게 문제 삼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아내의 요리에 절대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게 가장 핵심인 거죠.
어느덧 저녁 요리가 다 되면 이제부터 식탁에 온갖 이상하게 생긴 그릇들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요 장면이 저는 그다지 달갑지 않습니다. 평소 못 보던 그릇과 용기들이 나오면 설거지 할 때 깨뜨리지 않으려 손아귀에 힘을 더 주어야 하고 안 쓰던 잔근육까지 움직여야 하거든요. 게다가 처음 보는 숟가락, 젓가락, 포크, 나이프, 앞접시, 아참 또 하나 있어요. '치즈숟가락(?)' 뭐 이런 것들이 엄청 튀어나옵니다.
어쨌든 딸들을 위해 요리를 준비하고 그럴싸하게 식탁을 꾸미는 건 아내가 하고 싶은 거니 말리지 못합니다.
숟가락 들기 전, 식사 전 기도를 하기 전 꼭 해야 하는 게 있으니 그건 사진 찍기이죠.
"딸들 밥 먹으러 나오너라. 사진 예쁘게 찍어줘~" 누구에게 보여주는 것도 아닐 텐데 여러 각도에서 많이 찍어 둡니다. 예전 필름카메라 시절이라면 식재료 값보다 필름값이 더 많이 들었겠죠?
이런저런 그간의 일들을 얘기하며 저녁을 맛있게 먹습니다.
식사를 마쳤다면 저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식사에 쓰인 식기류와 수저류를 싱크볼에 담으며 1차 세척을 합니다. 소요시간은 대충 5분을 넘기지 않습니다. 이후 음식쓰레기까지 버리고 오면 아내가 향긋한 커피를 담아내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싱크볼에는 마치 하다만 것 같은 설거지 그릇들이 쌓여 있는데 이게 제 치트키인 거죠.
어쨌든 이렇게 금요일 저녁 식사와 설거지는 마무리가 된 겁니다.
다음날은 다들 늦잠을 푹 자고 일어나 아점으로 뭘 먹을까 궁리하죠.
저는 아무 말하지 않습니다. 아내는 모든 걸 준비해 두었거든요. 그저 저는 설거지만 하면 됩니다.
아내가 점심을 준비하려 앞치마를 두를 때 저도 옆에 서서 엊저녁 1차 세척 후 불려 둔 냄비와 식기류에 퐁퐁을 묻혀 거품세척을 합니다. 그런 와중에 아내가 점심 요리에 쓰인 도구와 그릇들을 함께 설거지 하죠.
그리고 점심을 맛나게 먹습니다. 그렇게 점심 식사를 마치면 아까와 마찬가지로 다시 1차 세척만 합니다.
저녁 준비를 할 때 거품세척을 하는 겁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면 '이상하다. 그게 그거 아냐?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라고 의문이 생기시겠죠.
그렇게 보시는 게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저의 기분이 다른 거죠. 식사 후 커피를 음미할 새도 없이 다시 설거지를 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한참 얘기하고 보니 뭐 대단한 키트키인양 읊어댔는데 별거 없네요.
이제 이 글의 핵심을 말하고 싶습니다.
남편이 설거지를 하면 아내는 요리에 정성과 시간을 잔뜩 쏟아 넣습니다.
요리 중에 아무리 많은 식기류와 수저류를 내어 놓아도 설거지를 신경 쓰지 않으니 심적으로 아주 여유로울 게 뻔합니다. 그러니 요리가 훌륭할 수 밖에요.
오늘도 평소와 같이 설거지를 하였습니다.
조금 후면 저녁 식사시간이니 조금 기대를 해 봐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