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윤리'에 대해서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윤동주, 「병원」 中
어느 날 병원에 한 눈사람이 찾아왔다. 의사는 꿈을 꾸고 있나 생각하면서도 진료실로 들어오는 그녀에게 의사는 최대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물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듯 답을 한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라고. 의사는 갑작스럽게 그녀가 눈사람으로 변했던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지 묻는다. 그녀는 조심스럽지만 그렇다고 못 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징조 같은 것은 없었어요. 특별한 날도, 특별한 장소도 아니었고요. 매일 산책하는 천변 길을 천천히 걸어 약속 장소로 근처로 왔고, 약속 시간인 오후 여섯 시까지 이십 분 가까이 남은 것을 확인하고 물가의 벤치에 앉아 있었을 뿐이었어요.”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현수를 기다리다가 이렇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현수는 일하던 회사에서 인턴으로 처음 만났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에 대해 제가 아는 게 이 증상에 도움이 될까요?” 의사가 물었다. 그녀는 그를 기다리다 이렇게 되었으니 아무 연관이 없지는 않을 것 같다며 말을 이었다. 또한 눈사람이 되기 전에는 분명 “보이지 않는 길고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그들을 연결하는 실체”(30쪽)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셨군요?”라고 의사가 물었지만 그녀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한다. “사실 제가 아이가 한 명이 있거든요.”어렵사리 그녀가 한 대답은 현수가 아니라 그녀가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세 살에 낳았던 그녀의 아들에 대해서였다. “그렇다면 아이와의 관계는 평소에 어떠신가요?” 그녀의 아이는 “엄마가 집에 오래 있으니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사실 엄마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잖아. 아무래도 혼자 있어야 강해지는 성격인 것 같아”(56쪽)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 사실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일을 해야 했고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턱 없이 모자랐으며 “그건 그녀의 삶에서 가장 무겁게 지속된 결핍과 죄책감이었다.”(36쪽)고 털어놓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의사는 그녀의 증상이 갑작스럽고 안됐다고 생각은 했지만 오래 진찰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회진을 돌아야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병원에는 그녀와 같은 증상으로 찾아와 입원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의사는 그 질병에 대해서 모른다. 그래도 의사는 그녀에게 입원을 권유했지만 그녀는 거절하며 병원 밖으로 걸어 나온다. 몸이 녹는 속도를 늦춰보려 그늘 진 곳으로 걷는 그녀에게 소년이 걸어온다.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소년』, 192쪽) 그녀는 그 목소리를 듣고 멈칫한다.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보았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의문에 휩싸인다. 왜냐하면 기억으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외려 소년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광주를 떠올리게 했다.
살아가는 사람에게 살았다는 사실이 가장 큰 상처가 될 때 ‘비극’이라는 두 글자는 여남은 인생을 설명하기에 너무나도 짧다. 그런 그녀의 인생에서 결코 잊지 못할 어느 날 은숙은 일곱 대의 뺨을 맞았다. 취조를 당한 뒤 밖으로 나서며 그녀는 하루에 한 대씩 일주일 만에 그 기억을 지워낼 것이라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사실, 그녀가 맞았다는 사실보다 더욱 그녀를 경악하게 했던 것은 그녀를 때린 사람의 평범함이었다. 또한 그 사내가 필사적으로 찾아내려고 했던 번역자라는 사람의 얼굴 역시 평범했다. 그녀는 그와 과거 청계천 옆 제과점에서 만나서 마지막 교정을 본 적이 있었다. 교정을 본 뒤, 검열과에 가제본을 제출했지만 며칠 후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검은 잉크로 인해서 검은 숯 덩어리였다. 그 희곡집은 사실상 이 세상에 나올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것이다. 며칠 후 네 번째 따귀를 잊을 무렵, 그녀에게 그가 찾아온다.
흠칫 놀라 그녀는 손으로 눈언저리를 닦는다. 일곱 번 따귀를 맞고도 한 차례도 울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지금 눈물이 흐르는 건지 알 수 없다.
죄송합니다.
끈적끈적한 샘처럼 새어나오는 눈물을 빠르게 두 손으로 닦아내며 그녀가 말한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김은숙 씨가 뭐가 미안합니까? 왜 나한테 사과를 해요.(『소년』, 82-83쪽)
은숙은 왜 자신이 잘못한 일이 아닌데도 그에게 사과를 하고 있을까. 우리가 명백하게 아는 사실은 이와 관련하여 그녀에게 잘못이 없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누가 그녀가 사과를 하도록 만드는가.’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자. 그녀는 계엄군이 도청으로 향하던 그날 광주 도청에 있었다. 그리고 흩어지던 여대생들과 함께 전대병원으로 가서 살아남았다. 그녀도 처음부터 살아남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고백을 하며 그녀는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인해서 학교로 돌아가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2학년까지 마치고 결국 졸업을 포기했다고 이야기한다. 미안해하는 어머니와 달리 그녀는 집회를 하는 학생들을 보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집안 사정이 나빠지지 않았다 해도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 앳된 학생들의 스크럼 속으로 걸어 들어갔을 것이다. 가능한 한 끝까지 그 속에서 버텼을 것이다. 혼자 살아남을 것을 가장 두려워했을 것이다.”(『소년』, 87쪽)
은숙은 서선생의 연극을 보기 위해서 객석에 앉아 있다. 어느새 객석은 빈자리 없이 가득 찼다. 무대 앞쪽으로는 연극과 언론 관계자들이 있으며 뒤쪽에는 사복형사로 짐작되는 남자들이 흩어져 앉아 있다. 은숙은 검열에서 살아남지 못한 대사들과 살아남지 못할 배우와 작가들이 어떻게 될지 걱정하며 무대를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연극이 시작되고 배우들이 연기를 하지만 대사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아주 조그만 소리가 무대를 채운다. 관객들은 당황하지만 이내 배우들의 입모양 하나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마치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듯 허공을 향해 끼익, 끽소리를 내며 여자가 입술을 움직이는 사이, 삼베옷의 남자가 무대에 올라선다. 두 팔을 휘저으며 여자의 어깨를 스쳐 지나간다.(『소년』, 103쪽)
이것은 무언극(無言劇)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연극과는 다르지만 무언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분명 발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연극이라고 보기에는 그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대사가 거의 없다. 이런 이중적인 성격은 관객을 나눈다. 그들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관객의 귀에는 배우들의 “끼익 끼익”거리는 비명 소리만 들릴 뿐이다. 반면 배우들이 삼킨 말을 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최선의 형식이 된다. “왜 그는 이러한 연극의 형식을 택했을까”라는 형식에 대한 의문은 연극에 내재돼 있는가라는 한강의 논리에 대한 물음으로 구체화된다. 연극이 벌어지는 곳은 ‘사복형사’들로 대표되는 무언의 사회적 압력이 곳곳에 위치해 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작가는‘말할 수 없다.’는 구조적인 한계에 봉착한다. 그와 동시에 ‘먹줄과 롤러’로 검게 그을린 원고를 보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그럼에도 나는 이야기해야 한다’라는 고통스러운 윤리적 책임감을 마주한다. 이 책임감은 차라리 책무에 가깝다. 그들은 그것을 껴안고 고통스러워 하지면서도 결코 내려놓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윤리’다.
이러한 윤리는 그들의 내면적 치열함으로 만들어낸 윤리다. 모든 것이 불가능한 사회 속에서 가능을 말하기 위한 방법은 역설일 수밖에 없지만 이런 순간에 역설이란 기교가 아닌 윤리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이 된다. 왜 그들은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맥락에서 배우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마치 눈을 뜬 채 꿈을 꾸는 듯 허공을 향해”라고 비유한 것은 단순 비유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꿈의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비참한 몽유다. 누군가에게 하루하루의 삶 기억으로 인한 일상들이 투쟁이 되고야 만다.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삶은 ‘장례식’이 되고야 만다. 이와 같은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 “끼익 끼익”과 같은 비명은 그렇게 밖에 내지를 수 없는 처절한 초혼(招魂)처럼 들려온다. 이 비명이 무대를 벗어나 관객을 넘어 사회로 뻗어 나가 사람들과 공명할 때, 그 날 광주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광주’를 상기시키며 상처들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러한 서술이 가능했던 까닭은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 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소년』, 134쪽)
누군가 기억을 아직 갖고 있다면, 이와 같은 질문에 답변이 난감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광주는 한강이 말했던 바와 같이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다. 반복되고 있는 우리의 역사이며 일상이다.
어느 날 갑자기 눈사람이 되어버린 그녀가 매일 상처를 입는 곳은 일상이다. 어렸을 적 가정에서 폭군 같았던 오빠는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학급에서 괴롭힘을 당하다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더 믿기 어려웠던 것은 그녀의 부모가 가해 학생들의 부모로부터 대단찮은 합의금을 받고 사건을 매듭지었다는 사실이었다.”(87쪽) 이후 그녀는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야, 그렇지 않아? 이 상투적인 말을 그녀는 살아오는 동안에 여러 상황에서 자신의 가족사를 알 리 없는 타인에게서 들었고 마치 그녀 자신이 의도적으로 공격받은 것 같은 분노와 굴욕감을 그때마다 느낀다. 사회의 폭력에 대해 최소한의 방파제이어야 할 가정 역시 오빠의 죽음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난다. ‘평범’이라는 기준점은 어느새 우리 사회 속에서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상대적인 기준이 된 지 오래다. 그렇게 누군가가 내뱉는 평범한 한 마디가 어떤 사람에게는 폭언이다. 평범한 가정은 누군가에게는 바랐던 이상적인 가정이 된다.
“텔레비전이 없는 데다 뉴스 검색을 오래 하는 편이 아닌데도 그녀는 뉴스와 관련된 꿈들을 자주 꾸었다. 노동절 시위 중에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숨진 노동자의 시신을 경찰이 유족 동의 없이 부검하겠다고 발표한 날에는, 어째서 인지 살아 있는 그녀를 부검하겠다며 방역마스크를 쓴 의료진이 들것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오는 악몽을 꾸었다. 특히 지난 삼 년 동안은 죽은 아이들의 꿈을 꾸었다. 겹겹이 흰 천으로 감싼 수백 명의 아기들의 시신을 차례로 종이 상자에 담으며 그녀는 벌벌 떨었다. 빗소리인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인지 몰라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습자지처럼 얇고 반투명한 몸을 가진 아이들이 비를 피해 끝없이 복도를 아른거리고 있었다.”(37-38쪽)
그녀는 악몽을 꾼다. 악몽은 사회적 사건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연극의 기능과 유사하다. 노동절 시위 중에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숨진 노동자의 시신을 경찰이 유족 동의 없이 부검하겠다.”라는 대목에서 우리는 故백남기 농민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며, “특히 지난 삼 년 동안은 죽은 아이들의 꿈을 꾸었다”라는 문장에서는 세월호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사회적 사건을 ‘사건’으로 놓고 진단을 할 때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닌 위와 같이 일종의 ‘사회적 트라우마’를 겪는 간접적인 피해자들까지는 쉽사리 고려되지 않는다. 그들은 ‘현실 같은 악몽’에 시달린다. 사건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감을 넘어서 윤리적인 책임을 느끼는 그들에게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그 어떤 악몽보다도 끔찍하다. 과거와 달리 이와 같은 악몽 속에서 폭력의 주체는 얼굴이 없다.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방에서 그들은 다가온다. 얼굴 없이. 오히려 얼굴을 드러내는 사람은 늘 피해자다. 그렇게 얼굴 없는 폭력은 끊임없이 양산되고 확산되지만 방향이 바뀌었던 적이 없다.
다만 분명히 알 수 없는 건 이것뿐이야. 먼지투성이 창을 내다보는 것처럼. 아니, 얼음이 낀 더러운 물 아랠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가 인간인 건지”(46쪽)
『소년』속 은숙과 『작별』속 그녀는 우리에게 망각은 권리일 수 있어도 누군가는 뼈아픈 책무였음을 아프게 상기시킨다. 두 인물은 공통적으로‘어릴 적의 고통적인 체험-살아남음-일상 속 피할 수 없는 사건들과 마주함’이라는 서사를 겪는다. 은숙이 ‘악몽 같은 현실’속에서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녀는 ‘현실 같은 악몽’을 꾼다. 그들이 겪는 고통을 단순히 ‘개인적 트라우마’라고 진단을 내리는 것에는 많은 오류가 뒤따른다. 왜냐하면 두 인물이 겪은 고통은 공통적으로 사회적인 폭력이 시발점이며, 여기서 시작된 불길이 그들의 일상까지 번지며 모든 것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불길은 우리 사회 속에서 아직까지도 꺼지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한강은 우리에게 ‘광주’에서 제기했던 인간의 폭력성과 본질성에 연관되었던 질문을(『소년』) 인간의 사랑과 본질에 대한 질문(『작별』)으로 바뀐다.
“그는 대학 입학금부터 박사과정을 중단하기까지 모든 학비를 학자금 대출로 충당했고, 이후 육년 동안 그 막대한 빚을 갚는 대신 계속해서 채용에서 떨어지거나, 계약직으로 채용된 뒤 계약이 갱신되지 않거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는 일을 반복해 오고 있었다. 버티는 요령이 있어요, 라고 언젠가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사정이 좋지 않을 때엔 하루에 한 끼씩 맨밥만 먹는다고, 누구도 만나지 않으며 가족에게도 전화하지 않는다고, 낮 시간은 줄곧 방에서 보내며 짧은 산책은 이른 새벽에만 한다고 했다. 길에서 파는 음식 냄새를 견딜 수 없거든요. 그런 시기엔 한 달에 십 킬로씩 몸무게가 줄기도 해요. (49쪽)”
질문이 바뀐 까닭은 사회가 변했기 때문이다. ‘단군 이래 최초로 부모보다 못 사는 세대’에게 애초에 ‘출발선 상의 평등’은 주어지지 않는다.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대출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나뉜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무수한 갈림길에 놓은 개인에게 사회는 얼굴이 없어 냉혹할 수 있다. “계속해서 채용에서 떨어지거나, 계약직”으로 살아가며 “비인간적인 대우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는” 현수에게 우리는 매번 갈림길에서 운이 없었다고 이야기를 해야 할까. 힘을 내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그들에게는 힘을 나게 할 희망이 이미 없다. 이미 그는 여생을 “버티는 요령”으로 연명하고 있다. 이런 그에게 사회적 시스템을 이용하는 자들은 생존심리를 교묘하게 잘 이용한다. “그런 불안과 기대감을 능숙하게 다루”며 “이따금씩 정규직 전환에 대한 가능성을 암시하곤”했으며 (24쪽) “우리 회사, 한식구, 한솥밥을 먹는 다는 표현을 그는 즐겨 썼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어려움을 견뎌주면 우리 회사가 고비를 넘길 수 있습니다.”(27쪽) 그들이 말하는 ‘우리’, ‘한식구’, ‘한솥밥’과 같은 공동체에 관한 단어는 오남용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공동체에 속한 개인들은 과잉으로 인한 병에 들었다. 하지만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야만 하는 그들에게 현실은 깨지 않는 악몽과 같았다.
그런 현실 속에서 사랑은 사치가 되었다. 사치 품목으로 전락한 사랑은 받아본 적 없는 사람에게는 주기도 어려운 것이 된다. 그렇게 내가 줄 수 있는 한계가 생겨나고 이 한계는 경계를 유발한다. 자신의 경계 내에서만 사랑의 꿈을 꾸기 때문에 늘 타인에게 닿지 못한다. 그녀가 “살아 있는 자식들을 사랑하는 대신 죽은 첫아이만을 그리워하는 부모의 삶”(45쪽)을 이해하며 자라야 했다고 해서 그녀가 사랑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알기로 사랑이란 것은 감정인데, 강렬하게 사라지고 뜨거워졌는가 싶으면 환멸 속에서 식는 것”이다. 그녀는 사랑을 믿지 못하면서 정의를 내린다. 이런 정의로 인해서 현수와의 사랑 속에서 “이 실과 접지의 느낌은 무색무취인 데다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고요함이어서 거의 인간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31쪽)라고 말하며 현수의 사랑을 사랑처럼 느끼지도 못한다. 그녀는 일상적이고 평온한 느낌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이런 증상은 선천적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발병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가 아이와 끝말잇기를 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또한 끝말잇기는 앞사람이 던진 단어의 끝음절은 뒷사람이 말할 단어의 첫음절이 된다. 이것이 끝말잇기라는 간단한 게임의 룰(Rule)이자 현대 사회가 서서히 드러내고 있는 모순점이다. 앞사람이 던져주는 단어를 뒷사람은 이어나가야 하며 그가 말할 단어는 반드시 사전에 있어야 한다. 그곳을 벗어나면 게임에서 패배한다. 사랑에 관해서 그녀와 아이를 적용해 본다면, 엄마가 남기는 사랑의 끝은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아이는 엄마에게 받은 사랑을 바탕으로 사랑을 시작한다. 우리가 여기서 알고 있는 사실은 앞선 문장에서는 사랑을 적용했지만 사랑뿐 만 아니라 꽤 많은 단어들이 저곳에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첫음절에 이은 음절들로 단어를 구성하는 것은 아이의 자유다. 그래서 그런가. 그녀는 딸에게 “언제나 어둠보다 빛을 택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해”(41쪽)라고 유언에 당부를 남긴다. 더 이상 찾을 희망은 없지만 아직 바꿔나갈 기회는 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윤동주, 「병원」 中
의사는 그녀가 녹아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무엇을 돌아보는지 알지 못한 채 사력을 다해, 그녀는 가까스로 뒤를 돌아보았다.”(55쪽)고 했다. 그러기에 병원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던 충고를 들었어야지…. 라고 말하던 그의 표정이 굳는다. 가운을 털며 일어난 자리에 고운 눈가루가 떨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지 싶어 거울을 보니 그 역시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역시 그 스스로 말했던 과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에 처하고 만다. 그는 이제야 스스로 이 말도 안 되는 사건을 재구성해본다. 우선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그녀는 완전히 죽었는가. 그렇다고 확실히 말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녀의 신체는 붕괴하고 녹아내렸지만 눈과 물이라는 상태 사이로 아직 잔재한다. 쉽사리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고 그는 질문을 이어나간다. 그렇다면 그녀의 형체가 있던 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그곳은 철저히 공백이다. 우리에게 남은 공백은, 무언가 쏟아야 할 곳이 아닌 견뎌야 하는 곳이다. 그곳에 자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녀가 왜 병원에 남지 않고 고집스레 밖으로 나갔는지에 대해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는 합리의 세계 속에 있으며, 반면 그녀는 사라졌던 ‘실’이 이어졌던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봤던 한강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합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스스로 상처를 마주보며 상처에서 기인하는 질문에 끊임없이 답을 해나가며 아물려는 상처를 짓이기도 하고(『소년』) 그러한 그들의 세계 속에서 돌봐야 했던 가치들을 필사적으로 돌아보며 물음을 던진 채 현실에 편입되기보다는 소멸을 선택하기도 한다(『작별』). 물론 그들은 그들의 비극적인 결말을 선택한 주체는 아니다. 그들은 단지 고통을 겪는 주체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행위 자체가 수동적이거나 무의미하지는 않다. 오히려 그들은 선택하지 않은 고통 속에서도 주체적으로 기억하고 사유해내기 때문에 윤리적이다. 사유나 기억 없이는 치유도 없다. 그 속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되묻는다. 지금까지 ‘물음’에 대해서는 항상 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답을 요구하지 않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경우 해답은 오답이 된다. 그리고 종종 그 오답에 안심하며 의문으로부터 등을 돌려왔다. 그렇게 매번 질문은 반복되고 해답은 묘연해졌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해법을 제시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답을 하며 속단하는 대신에 그 질문 속에 “견디며 자리하는 것이다.”그것이 앞선 두 그녀의 윤리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사랑은 너무 진부한 결론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우선 진부함에 대해 답을 하자면 진부함은 논의의 빈도를 뜻하지 결론의 농도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많이 거론되었다는 것은 그 동안 결론의 지점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우리가 진부하다는 결론조차 여태 성취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새로운 사유’(푸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적 시스템은 거시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미시적인 삶까지 침투해 오고 있다. 현실에 대해 적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던 시대(『소년』)에 문학은 금지와의 투쟁으로도 제 소명을 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보이는 거대한 사실들과 미시적인 개인의 삶 사이 간극이 너무나도 커졌다. 이제 소설은 사실 속에서 진실을 발견해내다 한다. 그러기 위해서 기존의 세계는 무너져야 한다. 한강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출발점을 제시한다. 한강의 결론은 당신의 하나의 세계를 무너뜨리며 마주할 서론이 될 수 있다. 왜 매일 똑같은 악몽 속에서 살면서 내일은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에게는 더 이상 빌려올 미래가 없다. 이제는 꿈에서 깨어나야 할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이 말을 조심스럽게 떠올리며 “그녀의 건강”을 바라면서 “나의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 때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