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抒情)의 몰락

다시 써보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

by 변민욱

0.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그는왜 야만이라고까지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살펴봐야 할 단어는 크게 '서정'과 '야만'이 둘로 나뉜다. 각각 서정이란 자기의 감정이나 정서를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고 야만이란 교양이 없고 무례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위 문장을 풀어내면 아우슈비츠 이후 자기의 감정이나 정서를 드러내는 시를 쓰는 것은 교양이 없거나 무례한 행위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서정에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가.


본디 서정시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노래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희로애락을 노래하기 위해서는 영혼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프리모 레비로부터 배웠다. 인간이 언제든 고유명사에서 영혼 없는 보통명사로 추락할 수 있음을. 그는 저서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오,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다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대등하게 바람과 맞설 수 있다면! 영혼이 없는 텅 빈 벌레로 사는 이곳에서는 그럴 없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이현경 옮김, 돌베개, p.105) 인간의 몰락을 겪은 문학은 방황하다 생존을 위해 장래희망을 수정해야 했다.


그들이 노래했던 아름다움과 슬픔은 아우슈비츠 이후 야만행위가 되어버렸다. 그들이 지향하던 곳은 더 이상 '약속의 땅'이 될 수 없었기에 많은 이들이 방황 끝에 떠났다. 그럼에도 떠나지 않고 남은 자들은 사회를 이야기하며 크게 두 가지 길로 나뉘어 걸어갔다. 난해함과 환상 속에서 즉 '사회의 밖에서 사회를 이야기'하는 길이 하나였으며, 다른 한 길은 부조리함을 집요하게 해부하며 해부도를 그려내는 길이 둘이었다. 이 두 길 모두에서 작가는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지 않는다. 다만 환상적으로 혹은 담담하면서 치열하게 담아낼 뿐이다. 종종 전자에 대해 글에서 짤막하게 견해를 언급했었는데 오늘은 후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서정이 어떻게 부활해야 하는지 이야기하려 한다.





1. 또 광주인가?


아도르노의 저 문장이 낯설지만은 않다. 단순히 인용이 많이 되어서가 아니다. 이 불편한 익숙함은 아픔의 공유 덕분이다.저 문장을 우리 사회에 대입코자 한다면 아우슈비츠 대신 어떤 단어가 적절할까. 아우슈비츠란 갇혀있고, 그 안에서 짓밟히고 이로 인해 파손되었으나 실상 그러지 말았어야 했던 것을 의미한다. 이를 한국 사회로 은유하기 위해 나는 한 도시를 떠올리고 있다. 여타의 도시처럼 평범한 하나의 도시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광주'다. 그리고 이를 다룬 한강의 「소년이 온다」(창비, 2014)다. 이 책의 문장은 레비의 그것과 상당히 비슷한 무게감으로 우리를 누른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 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 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소년이 온다」, 134쪽)


한강의 문장을 보면 '무게가 있다'는 '뭉툭하다'와 유사어가 아니다. 무거운 칼을 치열하게 갈아 날이 선 문장들이 담겨 있다. 이런 문장들은 눈을 거쳐 당신의 심장과 폐부를 향한다. 맞닥드린 순간 감당하지 못하고 숨이 턱 하고 막히고 만다. 무겁고도 날이 선 문장은 대게 치밀하고 정교한 관찰에서 비롯된다. 감히 평을 하자면 한강은 광주라는 소재의 무게와 질감을 충분히 그려낼 수 있을만한 관찰력을 보유한 작가다. 그녀의 관찰력이란 태아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탄생한다.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은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같은 책, 17쪽)

처음에는 관을 둘러싼 죽음과 애도의 모순을 이야기한다. 흐르는 애국가를 따라서 그녀의 시선은 태극기를 향한다. 관을 감싼 태극기로 향하며 긴장을 끈을 놓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쌓아나가며 마지막 문장에서 마침내 이 긴장을 터트린다.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이 문장을 통해 그녀는 시체를 관통했던 총알의 주인을 고발한다. 혹자들은 말한다. '사회정의', '민주화 운동'을 다룬 문학작품은 이미 많지 않냐고. 그런데도 또 광주냐고. 이와 같은 물음에 나는 위 문장을 꺼내며 이 소설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2. 피맺힌 이야기


그녀는 특유의 관찰력으로 그녀의 서정을 이야기하기보단 서정을 삼킨다. 그리고 각각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소화해낸다. 그러나 어휘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 이야기라는 단어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고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야기의 생명성에 대해 나는 묻고자 한다. 이것은 개별적인 이야기인가. 아니면 우리의 이야기인가. 나아가 의미는 있지만 이미 숨진 과거인가. 아직도 숨 쉬는 현재인가. 아니면 숨을 쉬어나갈 미래인가.

저 사람들은 누구여? 왜 얼굴을 가려놨는가? 정수리까지 천을 쓰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노인이 묻는다. 의무를 피하고 싶어 너는 주저한다. 이 순간이면 언제나 주저했다. ······ 채 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 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쩍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같은 책, 45쪽

종종 우리는 푸념한다. 단조로운 일상과 그보다 더한 대화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의 평범함은 축복이다. 일상 속 대화가 평범함과 작별을 고하고 스틱스 강을 건너고야 말 때 비극은 시작된다. 일상이 절멸하고 삶은 비극이 된다. 삶이 비극이 된다는 무서움을, 그들의 고통은 나와 당신은 가늠하지 못한다. 악몽을 꾸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악몽이 도저히 끝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더욱이 악몽에 시달리는 그들의 손을 잡아 줄 부모도 자식도 모두 행방불명되었다. 꿈에서 그 얼굴들엔 하얀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가만. 다시 보니 이게 악(惡)은 맞는데 몽(夢)이 아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그들에겐 악몽보다 더 비참한 현실이 미소 짓고 있다.


남자를 침착하게 응시한다. 입술을 열어 달싹인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 다.
마치 눈을 뜬 채 꿈을 꾸는 듯 허공을 향해 끼익, 끽소리를 내며 여자가 입술을 움직이는 사이,
······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같은 책, 103쪽)

위와 같은 문장은 도무지 줄일 수가 없다. 한 편의 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 문장은 애도하는 안티고네의 레퀴엠 (requiem)이다. 사원이란 무엇인가. 그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추모의 공간이자, 그 또는 그녀로 인한 애통함의 총체와 같은 곳이다. 내 눈길이 닿았던 곳, 숨결이 닿았던 곳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렇게 그 모든 공간이 사원이 됐다. 내가 중언부언을 거듭했던 일상이 '비극이 되었다'를 그녀는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그러나 그 공명은 응축된 농도만큼이나 훨씬 강하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라고.


우리는 이 문장들이 무언극(無言劇)의 대사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 무언극이었을까. 무언극은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말할 수 없는 그것을 이야기해야 한다.'란 역설의 논리를 내포한다. 소설 속 무언극은 '말할 수 없다'라는 그 당시 사회적 강압에 따른 형식이었으며, 입술을 열어 달싹거리는 그 행위는 배우와 작가의 윤리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이 무언극은 광주를 이야기하는 작가의 모습과 닮아있다. 위 무언극 속 "끼익, 끽"과 같은 소리는 무언극의 논리 하에서 발버둥처야 했던 작가와 배우의 침묵 속 절규이자 비명이었다.


위와 같은 문장 사이 서정이 들어갈 틈은 없어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을 여실히 느끼고 있다. 서술상의 시점은 과거다. 하지만 나와 당신이 분노하고 아파하는 고통은 명백히 현재의 것이다. 이 시차를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차의 고통스러운 극복을 통해서 서정은 부활할 수 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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