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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비버 Oct 23. 2024

[뜨카] 적당한 미래

오늘을 불행하지 않게 만들 미래

고등학교 열람실에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친구끼리 매점에서 간식 사먹고 빌린 돈 500원이 갑자기 생각났다. 하지만 지금은 자습 시간이니 공부하고 있는 친구한테 별안간 500원을 들이미는 건 맞지 않겠다 싶어서 이번 자습 시간이 끝나고 500원을 건네주기로 마음 먹었다. 안타깝게도, 어린 나이부터 기억력이 좋지 않았던 것인지 그 500원은 자습 시간이 끝나고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갚았다!) 이런 식으로 몇 번이나 하려고 했던 것을 뒤로 미뤘을 때 그것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가령 기억력이라거나)이 필요함을 깨닫고 나서부터, 나는 생각난 것은 생각 났을 때 바로 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대학교 2-3학년쯤 되며 대학 동기들의 길이 저마다로 갈라졌다. 교환학생을 떠나는 친구, 두 번째 전공을 시작하는 친구, 휴학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친구… 나에게도 수많은 선택지가 있었지만 단 하나 끝까지 고르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고시를 준비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끝은 있으나 나의 끝은 언제 찾아올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것, 나의 10년 후를 위해 나의 오늘을 맞바꿔야 한다는 것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때 나에게는 캠퍼스에서의 낭만과 젊음이 허락하는 나태함이 너무도 달콤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 생각나는 것은 바로 바로 해야 만족했다.


그때 상상했던 10년 후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나는 10년 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가 선택했던 웃음과 편안함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 일이 주는 권태로움과 무의미함이 나를 잡아먹는 날이 늘어날수록 나는 자꾸 내가 가지 않았던 길을 힐끔거리게 된다. 그 길을 택했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더 행복하다거나, 아니 애초에 그 길의 끝에서 내가 승기를 잡았을지 아니면 진작에 도망쳐 버렸을지조차 알 수 없지만, 선택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오는 미련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는 말을 되새기면서 그때 선택하지 않았던 길을 이제서야 걸어볼까 고민하다가도, 늘 지금 현재에서 놓치게 되는 것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가 어렵다. 소중한 친구와의 시원한 맥주 한 잔, 가족과의 여름 휴가, 지금 유행하는 재미있는 드라마… 이 모든 것을 나중으로 미뤄두고 언젠지 모를 미래를 위해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것이 맞을까?


사람들 모두가 들어본 말이 있다. 오늘을 내 삶의 마지막 날처럼 보내라고. 오늘 먹고 싶은 것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보고 싶은 사람을 다음주로 미루지 말고, 오늘이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전력을 다해 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내게 이 말은 내 행동과 선택의 기준에 잘 부합했다. 그런데 삶의 시간이 쌓일수록 이 말은 참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내일이 내게 올 수도 있지 않나? 오늘 하고 싶은 걸 다 해버리고 나면 내일은 무엇을 하지?


오랜만에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 언니가 이런 내 고민을 듣더니 이런 말을 했다. 오늘이 행복하려면 내일에 대한 걱정이 없어야 해, 그러니까 우리는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망쳐버리지 않을 만큼만 적당한 미래를 대비하면 되지 않을까? 오늘 돈을 다 써버려서 내일 밥 먹을 돈이 없을까 걱정하다 보면 결국 오늘을 충분히 즐길 수 없게 된다. 내일에 대한 걱정이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일 마음에 드는 참치김밥을 사먹을 돈은 남겨 놓는다면? 내일에 대한 걱정 없이 오늘을 온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12년 후 가늠하기 어려운 어느날의 내가 사고 싶은 가방을 위해 돈을 아껴두는 것은 어렵지만 1년 후 겨울날 내가 가고 싶은 도시를 향한 비행기 티켓값을 조금씩 모아두는 건 생각보다 쉽다.


하고 싶은 것은 당장 해야 하고, 생각난 것은 바로 처리해버리는 것만이 끝을 알 수 없는 인생의 정답은 아니다. 우리는 오늘 주어진 24시간을 충실히 살아내야 하는 것도 맞지만, 예상치 못하게(?) 주어질 5년 후, 10년 후를 살아갈 대비도 해야 한다. 5년 후의 나에게 오늘을 양보할 수 없다면, 일주일 후의 나에게라도 오늘의 절반만 양보해보자. 일주일 후의 내가 건강해지기를 바란다면 오늘 먹으려고 했던 과자의 절반만 먹어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1년 후 내게 좀 더 맞는 일을 갖기 위해 2박3일의 휴가를 1박2일로 줄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 여유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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