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 이 귀가 눈에 안 보였나 몰라.”
아빠는 가끔 우리 앞에서 엄마의 귀를 만지며 놀리듯 이야기하셨다. 엄마의 양쪽 귓바퀴는 안쪽으로 접은 것처럼 말려있는데 여태 엄마처럼 특이한 귓바퀴를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엄마는 아빠의 장난에 “아이고, 참!”하며 귀찮은 듯 손사래를 치셨는데, 싫은 내색은 아니었다. 그 시절 엄마, 아빠만의 스킨십이 담긴 애정표현이었던 것 같다. 가끔 이렇게 엄마, 아빠가 꽁냥꽁냥 옥신각신 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마음이 간지러웠다.
나는 엄마를 참 많이 닮았다. 뜯어놓고 보면 안 닮았는데 전체적인 느낌이 그랬다. 엄마의 귀도, 눈도 닮지 않았다. 그중 내가 가장 다행스럽게 여기는 부분은 귀가 아니라 눈이었다. 엄마 눈은 쌍꺼풀이 없는 데다 눈두덩이 오목하게 솟아있었다. 살짝 돌출된 콧등과 함께 조화롭게 보이긴 했으나, 당시 미의 기준은 짙은 쌍꺼풀에 오뚝한 코였다. 하필 그 유전자는 오롯이 오빠에게로 대물림되었다. 오빠가 외모에 예민한 시기를 지나는 동안 엄마는 그 원성을 묵묵히 듣고 있어야 했다. 난 붕어빵 눈이 떠올라 오빠가 투덜거릴 때마다 속으로 키득키득거렸다.
우리 집은 참 가난했다. 아니, 넉넉하게 살지 않았다. 있어도 늘 없는 것같이 사는 게 익숙한 엄마, 아빠의 검소함 덕분에 우리 삼 남매는 꽤 오랫동안 '우리 집은 가난하다.'라는 명제를 속에 품고 자랐다. 불편한 건 없었다. 단지 촌스러울 뿐이었다. 가끔 "시골에서 자랐어요? 좋은 추억들이 많겠어요."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오우~ 겨드랑이가 간지럽다. 내가 자란 곳은 '시골'이 아니라 '촌'이라고 해야 딱 어울린다. '시골'이라는 단어는 왠지 소박하고 다정한 느낌이 난다. 엄마가 무쳐주는 제철 나물, 포슬포슬한 감자, 저녁놀을 배경 삼아 밥 짓는 냄새가 퍼지는 장소 같은. 우린 그보다 더 후줄근하고 투박했다. 바쁜 엄마는 자주 인스턴트 햄을 구워줬고, 감자볶음은 덜 익을 때가 많았고, 저녁놀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오빠는 낡은 매미채 가득 개구리를 잡아 내게 겁 주는 장난을 즐겼다. 햇빛에 그을린 얼굴은 새까맸고, 목에는 가끔 땀과 함께 땟국물이 흘렀으며, 겨울에는 볼이 발갛게 얼어 '촌병'을 달고 다녔다.
신기하게도 내가 촌스럽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는 '촌'을 벗어날 때였다. 엄마는 가끔 외할머니와 작은 이모, 작은 외삼촌이 사는 마산에 우릴 데리고 가셨다. 80년대의 마산은 '경남의 명동'이었다. 촌에 사는 나로서는 마산이 지금의 서울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둘째 이모네는 부자였다(적어도 우리 집보다는). 커다란 철문 너머로 넓은 잔디마당을 보유한 어느 사장님 집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주택이었지만, 학교정문보다 넓은 그 집 대문을 지날 때부터 이모집의 신세계가 시작되었다. 사촌언니 집에 가면 내가 TV로만 보던 영창피아노가 거실에 있었고, 커다란 전축, 명작동화전집이 가지런히 꽂힌 책장이 있었다. 사촌 언니와 동생 방에 있는 근사한 피노키오 책상과 2층 침대는 부러워도 가질 수 없는 것이라 이모 집에만 가면 나는 피아노를 띵똥거리다 예쁜 공주그림이 가득한 명작동화책에 빠지곤 했다. 그러면 이모부는 책을 읽는 나와 비교해 사촌언니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언니는 이모부에게 화를 냈다. 이 상황이 불편했지만 이모부가 불편하지는 않았다. 어쩌다 사촌 언니가 내 앞에서 꼬부랑 영어를 말하면 이모부는 몹시 흐뭇해하셨다. 이것도 해봐, 저것도 해봐. 언니에 대한 과한 애정이 투명하게 드러났다. 우리 꼬맹이들이 하는 놀이에 관심을 보이고, 뭐든 해주고 싶어 하는 어른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모부의 그 다정함이 '촌'에 사는 어른들과는 달라서 좋았다.
언니는 영어실력이 뛰어났다(영어는 중학교에서 만나는 교과목이라 나는 알파벳도 제대로 모를 때였다). 언니는 내가 고작 몇 개 아는 단어 중에 하나를 오묘한 소리로 발음했다. 내가 '애플'이라고 또박또박 소리 내는 단어였다. '애폴, 애폴.' 어떤 구강구조로 변신해야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인가. 아무리 따라 해 봐도 흉내 낼 수 없는 소리였다. 언니는 나보고 '촌스럽다'라고 놀렸다. 언니의 잘난 척이 고까울 때도 있었지만, 착한 척 받아주었다. 그래야 뭔가를 얻을 수 있을 거란 본능적 믿음이랄까? 그 전략은 곧잘 통했다. 언니는 교묘하게 나를 놀리다가도, 예쁜 길고양이 대하듯 날 측은하게 여겼다. 기분이 좋을 때면 언니가 아끼던 것들을 기꺼이 선사했다. 언니가 준 것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하이힐을 신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위에서 내려다보게 하는 콧대 높은 것이었다. 언니에게 받은 바비인형이, 학용품이 친구들 앞에서 나를 돋보이게 할 것이었다. 나는 그 특권을 누리기 위해 언니 앞에서 한껏 더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엄마는 나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자세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내게 늘 사촌언니가 입던 옷을 받아 입혔고, 싫증이 난 물건을 받아왔다. 엄마, 아빠가 새 물건을 사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붐비던 거리와 시내버스, 눈을 뗄 수 없는 백화점과 치킨버거 같은 신문물들을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고역이었다. 멀미가 심했던 나는 속에 있는 것들을 다 게워 내고 나서야 평온해졌다.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누더기 옷으로 되돌아온 신데렐라가 된 느낌이었다. 이모가 준 용돈을 몽땅 털어 마련한 냉장고 장난감은 집에 오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오빠와 동생이 남은 용돈으로 맛있는 군것질을 할 때도 나는 군침만 흘리며 양배추, 토마토 모형과 놀아야 했다. 결국 그것들은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애물단지가 되어 장롱이나 싱크대 밑으로 사라졌다. 내가 절대 '도시'스러울 수 없다는 걸 그것들이 증명해 주는 듯했다. 나는 곧 신데렐라 놀이에서 깨어나 양말바닥이 새까맣게 고무줄 뛰기를 하며 촌스러움에 익숙해졌다.
"애들 신발이 메이커도 하나 없고, 달랑 한 켤레씩 뿐이더라."
오랜만에 우리 집을 방문했다가 이모는 우리 신발을 보고 측은해했다. 한 번도 불편하지 않았던 삶에 물음표를 던졌다. '가난'한 건 부끄러운 건가. 우리는 불쌍할 정도로 가난하단 말인가. 불편하지 않았던 것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면서 괜히 트집도 잡아봤다. 엄마가 꺼내준 예쁜 원피스(언니가 입던)를 밀쳐내고 오래 입어 무릎이 닳은 쫄바지만 입고 다닌다든가, 왜 우리는 어린이날에 아무 데도 안 가고 아무것도 받지 못하냐 불만을 터뜨리는 오빠에게 동조하여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우리의 첫 반항이었던 것 같다. 그날 엄마는 처음으로 양념치킨을 시켜주셨다. 동네에 딱 하나뿐인 처갓집 양념통닭. 친구들 생일파티에서나 먹어보던 그 양념통닭의 맛은 가히 환상적이어서 우리 셋은 게눈 감추듯 먹었다. 엄마는 그렇게 맛있냐는 말만 옆에서 계속했다. 엄마가 한 조각도 먹지 않았다는 걸 이제야 알아채다니.
엄마, 아빠가 살림을 불려 더 큰 가게를 운영했을 때도 우리의 생활이 달라진 건 없었다. 몇 년 후 이모집의 전축과 이층 침대, 피노키오 책상이 우리 집에 들어왔다. 우리는 또 그걸로 한 시절을 보냈다.
우리가 유전처럼 물려받은 촌스러움은 우리를 칡넝쿨처럼 강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