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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린-7강] 첫 문장의 힘

1년 안에 쓴 글의 첫 문단을 다시 써보기

by 정채린

느끼지 못하는 모든 것들은 무의미하다. 인간은 테세우스가 오직 끈에 의지해서만 미궁을 빠져나왔던 것처럼, 의식이라는 작은 손전등을 들고 세계라는 구조물을 한 방향으로만 비춰가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나의 손전등에는 치명적인 균열이 있다.


창밖의 하늘은 회색 필터를 씌운 것처럼 흐릿하고 구름은 질량을 잊은 듯 부유한다. 빛이 창틀의 차가운 금속에 소스라치며 식는 동안, 나는 소리가 흡수된 듯한 복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단조로운 선과 색으로 설계된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생기를 잃은 듯하다. 계단, 벽, 문, 바닥은 물론이고 침대와 의자까지 모든 가구가 흑백 화면처럼 이어진다. 감각을 활짝 열어놓아야만 살아있는 것을 느끼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며칠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우울함을 느끼겠지만 나는 오히려 이 절제된 환경이 편안했다.


숙소에는 내 실험자 번호와 같은 번호가 태그처럼 붙어 있다. 방 또한 다른 공간들과 다르지 않다. 무채색의 매트리스 위 하얀 침구와 기본적인 가구가 놓여 있고 벽면에 설치된 작은 모니터는 내 뇌파의 생체반응을 실시간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내게는 의미 없다. 나는 이 사물들을 보면서도 그것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다. 나는 촉각이 없다. 세계와 한 번도 닿은 적이 없었다.


침대에 몸을 눕히자, 매트리스가 느린 속도로 적당히 가라앉는다. 눕는다는 건 근육의 문제이지 느낌의 문제는 아니다. 아마 이 침대는 부드러운 매트리스 일 것이다. 촉각으로 느끼지는 못해도 눈으로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눈을 감는 것은 나에게 세계의 소멸을 뜻했다. 침대에 닿은 등과 베개에 파묻힌머리, 목 끝까지 덮은 이불까지 모두 빛이 없는 세계로 사라져 버린다. 나는 감각 없는 세계 속에서 실체 없이 떠도는 영혼이 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신은 나에게서 시각마저 가져가버렸다. 세계는 나를 버렸다. 나의 원죄에 저주를 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것은 인간의 오만이었다. 아니, 이제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진동이 만들어내는 음파만이 나에게 남은 유일한 끈이 되었을 때 나는 좀 더 기민해야 했다. 그것이 저주의 끝이 아닌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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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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