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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도둑의 독이 든 땅콩버터

괜찮아, 나도 독이 있으니까.

by 정채린


일단 빵 맛집에서 발효가 잘된, 아주 푹신한 식빵을 사오는 거야.


탕종식빵이면 더 좋겠지만, 탕종법으로 만들지 않은 빵이어도 괜찮아.

중요한 건, 발효가 적절히 되어 곡물의 고소하고 깊은 향이 나고, 글루텐 형성이 잘 되어 균일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나는 빵이어야 한다는 거지.

옥수수식빵, 우유식빵, 버터식빵 등 모든 식빵이 다 좋지만, 브리오슈 식빵은 안 돼. 그건 너무 buttery하니까.



그다음엔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깨끗하고 잘 달궈진 팬에 식빵을 올려놓고,

식빵 안이 따뜻할 정도로만 데우는 거야. 적당한 온도의 속살과는 대조적으로,

팬에 닿는 빵의 표면은 바삭한 크러스트가 되도록 잘 구워야 해.



이때 빵의 풍미가 확 살아나는데, 팬에 구워지면서 생기는 캐러멜라이징이 보관 중에 약간 노화된 탄수화물의 맛을 복원시키고, 바삭한 식감을 더해 입안을 즐겁게 하지.



다음에는 실온에 꺼내두어 부드러워진 땅콩버터를, 잘 구운 식빵이 식기 전에 듬뿍 바르는 거야. 빵의 표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텁게!

땅콩버터가 빵의 온기에 녹아 빵의 기포 사이사이로 스며들도록 아주 잠깐 기다려.

땅콩버터의 표면에 잼 나이프가 지나간 자국이 뭉뚝하게 사라져갈 때, 이때가 바로 기다려온 그 순간이야!



식빵을 입에 가져가면, 먼저 땅콩버터의 고소하고 달큰한 향이 코를 스치고,

한 입 깨물면 바삭한 빵의 크러스트 소리에 귀가 즐거운 비명을 지르지.

혀로는 두툼하게 발린 묵직한 땅콩버터의 고소함의 영혼을 맛보는 거야.

약간의 목막힘을 느끼면서.

그게 미식의 즐거움으로 가득 찬 내 영혼이 무거워져 목을 누르는 거라고 상상하면서.



‘땅콩버터에 대한 설명은 왜 없어?’ 하고 생각하지 않았어?

이렇게 식빵에 대해 세밀하고 엄격하면서도 땅콩버터에 관대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 명쾌해.

100% 땅콩으로만 만들어진 땅콩버터든, 소금이 첨가되었든, 설탕이나 식물성 기름이 들어갔든,

아주 곱게 갈렸거나 뻑뻑하게 갈렸거나, 아주 묽거나 되직하거나, 등등...

땅콩버터의 모든 형태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언젠가 나의 수필 선생님이 “다양성은 인정하나, 틀린 것을 다양성에 넣을 수는 없다.”라는 말을 했을 때

위험한 말이지만 맞는 말이기도 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 생각은 땅콩버터에는 적용할 수 없어. 땅콩버터에는 틀린 것이 없으니까.

어떤 땅콩버터든, 모든 땅콩버터는 다 옳아.


마치 모든 천사가 다 옳은 것처럼.




P.S.

재밌는 거 말해줄까? 난 땅콩 알레르기가 있어. 심하지는 않아.

그냥 피부에 간지러운 발진이 일어나는 정도야.

그래서 땅콩버터를 먹기 전에는 항상 알레르기 약을 먹어야 하지. 그래도 난 땅콩버터를 사랑해.

사랑하는 것에 독이 있어도, 그것을 끊임없이, 강렬하고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땅콩버터로부터 배웠어.

모든 물체에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랑하는 것에는 약간의 독이 녹아 있는 것 같아.


괜찮아.

나도 독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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