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내리던 날
펑펑 내리는 눈을 보고도 덤덤하게 느끼는 요즘
하얀 눈이 펑펑 내렸다
금세 온 세상이 하얀 동화 나라가 되었다
소담스럽게 내린 하얀 세상은 나뭇가지 위에도,
주차된 차들위로, 베란다 맞은편 건물사이에도,
포근하게 이불 한 겹 덮은 것처럼 아주 균일하게
내려앉았다 마치, 일정하게 딱 맞춤과 정직한
것을 좋아하시던 우리 아버지의 생각처럼, 누구 하나
빠짐없이 어디에도 과하지 않게 평온한 모습이다
너무 하얀 눈은 깨끗하게 골고루 나누어 놓고 평등을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얗게 눈이 내리는 날은 평화롭고 따뜻하고, 하얀 동화 나라처럼 온 세상이 평온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사실, 겨울 추위는 무섭다 그 속엔 여러 가지 모습이 들어있다 겨울은 누구나의 결핍을 만나거나 힘껏 이루어내지 못한 회한과 맞닿으면, 심하게 움추러들고 혹독하게 몸과 마음이 춥다 조금이라도 힘든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날의 날씨보다 더 춥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소담스럽게 하얀 눈이 펑펑 내린다 해도 예쁨은 잠시뿐, 하얀 겨울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언제부터인지 추위를 견뎌내기가 쉽지 않은 계절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
겨울은 가끔 진한 찬바람이 뼈마디
시린 가슴까지 파고들어 진한 회한마저 느껴지는 건 나만 그런 것일까 아마도 나이 든 탓일 테고 몸과 마음이 약해지고 과정에서 느끼는 것들이다 가끔 가까운 지인들이 건강을 잃어서 고생하는 것을 추운 겨울엔 더 남일 같지 않게 느껴진다 신체의 약한 감정이 겨울과 맞닿으면 슬그머니 동화되어 아주 혹독하게 더 추운 겨울이 된다 겨울의 뒷모습은 대단히 알 수 없는 의미들이 숨어있는 것처럼 시리다 순백색 아름다움 그 뒷면이 지닌 서늘한 기운이 서려있고 비밀을 품은 것 같은, 때론 겨울은 매섭고 매몰차게 다가온다
예전에 좀 더 젊을 때 겨울에 단단하게 나를 다잡고, 긴장을 놓지 않으려는 다짐 같은 것을 하기에 좋은 계절이었다 마음을 다잡아 계획을 세우기에 아주 좋은 기회의 계절이기도 했다 아마도 찬기운이 주는 매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겨울에 느끼는 알싸한 찬기를 참 좋아했다 정신이 말아지는 듯한 톡 쏘는 청량감이 느껴지는 겨울을 좋아했다 하얀 눈이 덮인 싸늘한 시원함을 품은 겨울, 그 맛을 참으로 좋아했다
하얀 겨울바다에서 저 멀리 시선을 두고, 눈 내린 겨울 바다에 아득하게 펼쳐진 수평선 보는 것을 좋아했다 차가운 순백색 겨울 그 너머에, 뭔가가 있을 것 같아서, 먼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깊은 생각에 마음을 맡기고는 그 분위기에 심취하기를 참 좋아했다
그런데 이제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런 기분을 맘껏, 시원하게 누릴 수가 없다 그야말로
세월 앞에 제대로 순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눈이 펑펑 내리는 길을 따라 걸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면 발자국을 내어 발로 툭툭
길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뽀드득뽀드득 소리에
귀 기울여 보기도 하고, 괜스레 기분 좋아서 두 팔
벌려 비행기 흉내를 내기라도 하면 기분이 너무
좋아서, 날아갈 것 같아서 애써 어깨를 으쓱으쓱
거렸다 내 기분을 애써 차분하게 다독이며
'날아갈 것 같아!'
내속에 있는 동심과 마주하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좋은 것도 아닌, 나쁠 것도 없는
무감각하고 차분하게 사물을 보는 나를 보게 된다
지난 시간 속에 어떤 그림을 그려 넣었길래,
얼마나 무거운 짐을 양손에 들고 있었길래,
무감각인지 알 수가 없다 지나온 발자국이 얼마나 화려했기에 '순백색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말없이 차분해지는지 알 수가 없다
시간이 주는 여유라고 변명하기도 뭣하고, 속에 있는 것을 꺼내보려 몸부림을 해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얗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한참을 걸었다
하얀 발자국이 자꾸 나를 따라오며, 기억 속으로
나를 초대하는 것 같았다
'푸드덕푸드덕' 검은 새의 허공을 짚는 날개 소리,
창공을 가르며 얼음에 부딪쳐 튕기듯이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소리, 여기저기서 재잘되는 소리,
눈덩이를 삐그덕 삐그덕 굴리며 뒷 따르는
발자국 소리, 기억 속에 있는 예쁜 감성들이
거기에 있음을 일러주고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
나이를 더해가면서 무감각해지고 서걱하게 굳어가는
감정은 시간을 차츰차츰 쓴 결과일 것이다
나의 몸에 지니고 있던 소중한 것들이 야금야금
아주 조금씩 빠져나갔던 것이다 세월과 함께
한다는 것은 몸에 있는 소중한 것들이 슬금슬금 빠지는 것이 마치 세상 이치처럼 말이다
생각과 느낌마저도 어느 순간 느슨해지고 생기가 없는 일상이 계속되는 것은, 시간 앞에 점점 다소곳하고 겸손해지고 있다
펑펑 내리는 눈을 보고도 별 반응이 없다면 나이 들었다는 것일 테고, 그 뒤로 춥다는 마음이 많아지면 그것은 분명 나이 들었다는 것이다
날마다 나타나는 해를 등진 그림자를, 앙상하게 많이도 쌓아 두었던 것이다
젖은 낙엽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는 기억저편의 예쁜 감성들이, 왜 그곳에 버려졌는지 알 수가 없다 나의 예쁜 감성이 한쪽에 웅크리고 꼬깃하게 박혀있는지 알 수가 없다 시간의 흔적은 조용히 은밀하게 다가와서
아주 작은 것을 표시 나지 않게 하나씩 하나씩 빼낸
것처럼 조금씩 비워지는 헐렁한 흔적들 뿐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말없이 서 있는 허수아비 같고, 혼자 먹는 늦은 저녁 같고, 웃음기 없는 해탈의 모습으로, 외로이 쓸쓸히 홀로 걷는 길이다
세월을 쓴다는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치에 순응하는, 정직한 수레바퀴 같은 것이다 조용히
그 길을 가고 있을 뿐이라고
눈 오는 펑펑 내리는 날 되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