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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집 종부 "나의 엄마"

사대부 집안 종부의 인생이야기

by 현월안




유교사상과 예의범절을 중시 여기는 사대부 집안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작된 어머니의 삶은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아주 몸이 고단한

삶이었습니다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형제들이 모두 한집에 살았고, 그 밑으로

딸린 식구들을 포함해서, 널찍한 우리 집 앞마당은

저잣거리처럼 찾아드는 사람들과, 늘 북새통

속에서 하루 일과가 시작이었어요 종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종갓집에서

이루어졌으니, 시끌벅적 우리 집은

집성촌의 민원해결 장소였을 만큼 사람로

넘쳐나는 집이었습니다

그때에, 명절과 4대 봉제사를 모시는 날에는 제사

인원이 100명이 넘을 만큼 사람이 북적였지요

멀리 서나 가까이에서 오는 손님이면 싫은 내색

하지 않고 늘 웃는 얼굴로 방긋 웃으며 손님방을

내주었고, 어머니 특유의 톤을 높여 반기는

추임새 인사법은, 굳어 있던 마음이 싹 녹을 만큼

착 감기는 인간적인 반가움으로


" 아이꾸! 날씨가 추워요 어서 오셔..."


손님 손을 털썩 맞잡고 한 참 안부를 물어야

인사가 끝이 났고, 사람 좋아하고 정이 철철

넘쳐흐르는 종부의 심성덕에 우리 집 문턱은

닳고 닳았습니다

진심을 다해 손님 대접하는 것은

어머니가 정해놓은 원칙이었습니다

마치, 대단한 사명감이 몸에 배어있는 듯,

뜻이 몸에 장착된 것처럼, 사람들에게 대하는

마음이 늘 진심으로 한결같았고,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눈으로는

부드러움을 가득 담고는 그 마음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곤 했습니다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친척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즐거운

표정으로 진두지휘하는 어머니의 밝은 표정은,

오랜 세월 내공이 쌓인 여유 있는 여장부

같았고, 총기 있는 눈빛과 잰 몸짓,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사대부

종부의 오래도록 몸에 물들여놓은 묵직한

훈장이었습니다

앞에서 이끄는 어머니의 밝은 표정 덕분에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소고한

음식향기는 푸른 하늘에 뭉게뭉게 피어

올랐습니다

그러면 동네 이웃들은 고소한 향기에 취하고,

부엌에서 나는 웃음소리에

놀라고 동네 부러움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음식을 만들어 반듯하게 내어

놓는 일이 어머니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에

미리미리 준비된 계획은 늘 분주했습니다

명절과 큰일이 다가오기 전에

어마어마한 양의 놋그릇을 마당 한기운데

펼쳐놓고 정성 들여 닦는 것부터 시작으로

미리부터 담아 놓고 맛을 내야

그날 딱 맞게 맛들어 있을 수십 가지

종류의 김치들,


"그 댁 종부 김치 맛은 알아주고 말고,

그 집 김치는 달다 달아..."


동네 사람들이 인정했던 맛이었고

약과, 식혜, 다과의 차종류와 함께 후식

상차림으로 나가야 하는 것들을 미리

준비되어야 했고, 사계절 밑반찬으로 찌고,

말리고, 삭혀서 준비해야 하는 건나물과

갖가지 젓갈 종류와 엄청난 양의 간장과

된장, 끝이 보이지 않는 장독 산더미들,

이런 모든 준비는 어머니의 머릿속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년 계획된 반복적으로,

꼼지락꼼지락 어머니의 손과 무릎을 갉아 내며

예술 작품을 빚어내듯 하셨습니다

그 묵직한 사명감을 보상이라도 받는 것처럼

갖가지 음식이 펼쳐진 사람들이 모인

그날(생신, 명절, 제사, 중중행사...)은

화려한 상차림으로 꽃을 피웠지요

순간은 음식의 달인을 넘어 장인의

손길이 빛을 발하는


"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빛나는 시간"


이기도 했습니다 누구나가 인정했던 음식

솜씨는 정말 일품이어서

그 깊은 맛을 내는 손맛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어깨에 짊어진 묵직한

숙명"으로 단련된 당연한 이유였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 속에서 단연 돋보이고 훌륭했던

것은 "사람들을 모두 다 포용하는 너그러운 마음"

덕분에 할아버지가 더 신뢰하고 예뻐하셨고

"우리 며느리가 골목을 지나가면 골목이 환하다"

하셨을 만큼, 며느리의 고마움과 수고로움을

달리 표현할 그 어떤 말이 없었겠지요


그 옛날, 어머니와 아버지가 첫선을 볼 때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누가 종부될 상인가!"


며느리감을 적극적으로 사람을 찾아 나섰던 것은

맏종부의 역할이 훗날 많은 일들이 펼쳐질

것이라고 할아버지는 훤히 알고 계셨기 때문에

집안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서 그렇게도

신중하게 고민을 하셨던 것이지요

공을 들여 간택된 어머니는, 온화하고

고운 인상과, 말씨, 품성, 모든 것이 그에 부합하는

딱 맞춤 종부였던 것이지요

할아버지가 보기에도 어머니의 힘듦을 알기에

할아버지는 늘 큰일 치를 때마다 어머니의 칭찬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하셨고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칭찬마약"에 더 신이 나서 영혼을

갈아 넣을 만큼 힘껏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웃어른들의 마법 같은 칭찬이 어머니를

크게 더 크게 성장시켰지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바르고 제대로 된

이끄심으로 어머니가 가진 능력은 끝도 없이

펼쳐냈고, 사람들 속에서 아름답게 빛이 났고,

무엇보다 사실인 것은

어머니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훌륭해서

할아버지가 정말로 인정"하셨던 것이지요


어머니가 단아하고 고운 인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예전에 고등학교 때 일주일간 생활관

예절교육을 받는 시간이 있었어요 마지막 날은

어머니들을 초청하는 시간이었는데, 어머니들이

오시는 날, 미용실에서 단장을 하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오셨더라고요 교실을 들어서니까

모두가 예쁘다고 소리를 지르며 난리였지요

지금으로 말하면 마치 연예인 보는 것처럼

환호했습니다 난 처음으로 어머니가

"곱고 예쁘다"는 것을 그때 제대로 알았습니다

인상이 편안하면서 단아한 아름다움이 정말

예쁘셨지요

한평생을 사람들 속에서 인정받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어머니는 그 많은 일을 해 내셨고,

그 손길로 종가의 격을 아주 고급스럽게 높여

놓았습니다

어머니의 고단한 시간을 어찌 몇 자 글로 표현이

될까요 그 긴 시간을 다시 회상하는 것조차 송구한

반추이지요 자녀들은 있는 그대로 어머니의

시간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또 숙연하게 기억할

뿐이고, 어머니의 지난 시간이 감사하다고 말을

할 뿐이지요

그런데 이젠 아쉽게도,

어머니의 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반갑게 맞이해 주면 서로 고맙다던

사람들의 좋은 기억과 수많은 일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기억

조차도 희미해져 갑니다 그 고운

인상이 요즘은 무표정하기도 하고, 정지된

시간 속에 있는 듯하고, 저장된 기억은 하루하루

지워져 갑니다 멈춰버린 시간들은 뼈마디 사이로

숭숭 뚫린 바람의 시간만 들락거리지요

온통 그 자리에 정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이쁜 치매가 와서 요즘 표정은 아주

가끔 웃어 보이며, 새초롬하게 수줍은 많은 새색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지나온 역사가 커다란 우주 같아서

가만히 어머니를 지켜보고

있으면 마치 영화 필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힘든 역사 다큐를 보는 듯해서 마음이 숙연해지고

먹먹해지고, 한쪽 가슴이 찡해지는 뭉클함이

밀려오지요


요즘도 꿈을 꾸고 잠꼬대하시며, 식은땀을

흘리며 힘겹게 일어나서 하시는 몸짓을 보면,

그때의 언어들이 나지막이 들리지요 아마도


" 어머니의 꿈속에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아직도 제사상차림을 하시느라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계시는 중"입니다


이제는 치매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더 이상 나빠지지 않고, 지금 만큼만이라도 유지

되다면 당분간 "이런 행복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어머니의 지난 시간은 사람들 속에서 빛난 값진

시간이었고, 어머니의 가슴으로 품은 넓은

흔적은 빛나는 명품이었습니다

아직 어머니가 살아계셔서 세상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 순간 이대로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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