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있고 웃음이 있고 노래가 있고 사랑이 있다
올가을은 유난히 예식장 갈 일이 많았다. 아직 예식장 갈 곳이 세 곳이나 더 남아 있다. 올해가 유독 결혼으로 가득 찬 해였음을 실감하게 된다. 예식장에 들어설 때마다 낯익은 장면보다 새로운 기운이 먼저 다가온다. 언젠가부터 결혼식이라는 의례는 경건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젊은 세대의 숨결을 닮아 자유롭고 아름다운 축제 분위기를 연출한다.
예전의 결혼식엔 주례가 있었다. 지혜롭고 연륜 가득한 어른이 신랑·신부를 향해 일생의 도리를 알려주는 자리, 때로는 너무 주례사가 길어 하객들이 허리를 바로세우던 그런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결혼식에서는 대부분 아버지의 몫으로 자연스럽게 옮겨왔다. 신랑의 아버지는 축사를 하면, 신부의 아버지는 성혼선언을 하게 된다.
어쩌면 그 변화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신의 전부 같던 아이를 삼십 년 넘게 품고, 지켜낸 아버지의 말은 그 어떤 준비된 문장보다 진실하다. 누군가의 언어가 아닌, 아이의 삶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건너온 이의 목소리이기에 말의 속살이 다르다. 축사의 내용이 진실하고 마음에 더 깊이 와닿는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축사 도중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도 드물지 않다.
예전엔 딸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엄마들이 주로 감당했다면, 요즘은 아버지가 축사를 하며 더 많이 울컥하는 걸 보았다. 삶이 바뀌고 가족의 구조가 바뀌고, 감정의 표현 방식도 새로워지고 있다. 무엇보다, 요즘 결혼식은 울음보다 웃음이 많다. 예전처럼 시집보내고 장가보낸다는 이별의 정서가 아니라, 두 사람이 스스로 선택해 만들어가는 한 편의 축제를 함께 축하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박수 소리에 음악이 실리고, 음악은 다시 노래를 불러오고, 노래는 모두를 즐겁게 만든다. 결혼식이 기쁨이고 가족의 축제처럼 변해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결혼식 정서가 어느새 부드럽고 유연해졌음을 느끼게 된다.
얼마 전 사촌동생 아들의 결혼식에서도 그 변화를 생생히 느꼈다. 신랑의 아버지인 사촌동생이 축사를 맡았는데, 부산 사투리를 살린 구수한 말투에 하객들은 시작부터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에서 나오는 유머는 가벼운 위뜨고. 웃음은 긴장을 풀어주고, 마음에 담아둔 축복을 더 자연스럽게 전하는 사랑이다. 그날의 결혼식장은 한 편의 따뜻한 모노드라마 같았다. 무대 위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였지만, 그 뒤에서 조용히 어깨를 내어준 가족들의 사랑이 장면마다 반짝였다. 웃음이 터질 때마다 신랑 신부의 눈가엔 아련한 빛이 고였다. 웃음 속에 진심이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식장을 나오면서 문득, 결혼이란 단순히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기보다, 가족과 가족이 서로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깊은 통로이고 연결이다. 결혼이 독립이라면, 그것은 누군가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탱했던 사랑을 품은 채 새로운 세상에 닿는 일이다. 그래서 요즘 부모의 축사에는 슬픔보다 감사가 많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
"이제 서로를 지켜주며 살아달라"
"삶이 어렵거든, 그때에도 오늘처럼 웃어라"
그 짧고 다정한 당부는 인생을 온몸으로 살아낸 이들의 지혜이고, 사랑이라는 언어가 품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울림이다.
예식장에서 마주하는 신랑과 신부는 고운 천사 같다. 꽃처럼 피어난 얼굴이고, 설렘으로 반짝이는 눈빛이다. 서로를 바라볼 때 드러나는 순한 미소는 천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식에서의 그 모습은 매번 새롭고, 언제 봐도 사랑스럽다. 그러나 예식장에서 신랑 신부가 더 빛나 보이는 이유는 단지 젊음 때문이기보다 그들의 뒤에서 묵묵히 서 있는 부모와 가족, 그들이 걸어온 지난 시간과 그 시간들이 쌓여 만들어낸 사랑의 흔적이 새 신랑과 신부의 얼굴에 곱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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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이 많은 올가을, 매번 새로운 질문을 품고 돌아온다. 사람이 사람을 축복한다는 건 무엇일까. 가족으로 산다는 건 또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웃는 얼굴로 진심을 다해서 누군가의 또 다른 시작을 축복해 주는 일은 아름답고도 귀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