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
살다 보면 문득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익숙한 거리를 걷다가도 마음이 묘하게 비어 있는 듯, 하루가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듯 허전해지는 시간. 잘 살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애쓰는지, 앞으로의 날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 날들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순간에 나를 붙잡아 주는 건 대단한 지혜도, 누군가의 반듯한 조언도 아니다. 아주 조용하고 사소한 것들이다. 문득 머리 위로 떨어지는 은은한 늦가을 햇빛, 차 한 잔의 온기, 그리고 삶이 쉬워지지 않을 때도 나를 바라봐 주는 가족들. 세상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소란스럽지만, 정작 삶을 지탱하는 건 이렇게 작은 온기들이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찻집에서 마주 앉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며 "요즘 어때 잘 지내지?"라고 묻는 평범한 인사였는데, 문득 그녀의 표정에서 어른거리는 고단함을 읽었다. 하루하루가 버겁다는 말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한 채, 그는 짧고 단단한 문장 하나를 꺼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말끝이 헛헛하게 떨리는 듯했지만, 그 말속에는 긴 시간 눌러온 기운이 있었다. 살아내느라 애쓰는 사람만이 내는 한숨의 온기. 그런데 오히려 삶을 어떻게든 통과해 온 사람만이 가진 묵묵한 다짐처럼 들렸다. 혼탁한 세상에서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건 작은 말 한마디인지도 모른다.
모두 저마다의 세상을 건너고 있다. 누구는 잔잔한 물을 지나고, 누구는 갑작스레 높아진 파도에 휩쓸리기도 한다. 어떤 날은 내가 노를 저어야 하고, 또 어떤 날은 애써 잡고 있던 노를 내려놓아야 한다. 세상은 방향조차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연결은 누가 대단한 해답을 건네서라기보다, 함께 앉아 고민을 나누는 따뜻한 온기다. 말없이 건네는 따뜻한 차 한 잔과 고단한 하루 끝에 괜찮냐고 묻는 짧은 안부 메시지와 아무 말 없이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의 여정이다.
인간관계는 때때로 기대만큼 따뜻하지 않을 때가 있다. 서운함도 생기고, 노력한 만큼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람과 연결되고 사람을 향한다는 것이다. 관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로에게 기대고, 때로는 실망하고 또다시 손을 내민다.
어느 순간부터 인생은 거대한 목표에 닿기 위한 경쟁이라기보다, 마음의 결을 서로 어떻게 빚어갈 것인가의 고민을 생각을 하게 된다. 빠르게 달리느라 주변의 사람을 놓치지 않는지 살피고,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여유를 남겨두고,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에 나의 온도가 묻어 있는지 알아야 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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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누군가가 '사는 게 다 그렇지'라고 말하면, 그 말이 체념으로 들리지 않는다. 긴 시간을 써본 사람은 삶이 서로를 비추며 건너가는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된다. 오늘도 곁에 사람이 있어서 내가 흔들리지 않고, 사람이 있어서 내가 다시 살게 한다는 것을 안다.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삶이 계속되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