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더 얇아지는 선택

뭐든 속도를 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by 현월안




넷플릭스는 참 똑똑하다. 화면 앞에는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영화가 큼지막하게 놓여 있고, 그 아래에는 내가 이미 보았던 취향을 분석해 내놓은 추천 목록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새로 공개된 영화와 드라마, 또 영화제 수상작들이 유혹한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게 고르지 못한다. 한 편을 고르기보다 리모컨을 쥔 채 예고편 사이를 끊임없이 이동한다. 짧은 장면과 압축된 서사와 조금씩 맛을 보다가 또 다른 영화로 넘어간다. 진득하게 두 시간을 내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일은 쉽지 않을 만큼 요즘 간사해졌다.



어쩌다 마음을 먹고 한 편을 선택해도 오래가지 않는다. 전개가 느리다 싶으면 금세 뒤로 가기를 누른다. 재미가 없다는 판단은 순식간에 하게 되고, 다시 추천 목록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몇 편의 예고편과 중요 장면을 오가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 있고, 남는 것은 피로감뿐이다. 여러 영화의 재미있는 장면을 두루 맛보았다는 위안은 있지만, 한 편의 영화가 끝났을 때 느끼던 깊은 여운은 찾기 힘들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듯 요즘 영화는 똑똑하다. 시작부터 숨 가쁜 속도를 자랑한다. 도입부에서 관객을 붙잡지 못하면 곧바로 채널이 돌아가 버린다는 사실을 제작자도 감독도, 관객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영화는 점점 더 빠르게, 더 자극적으로 변한다. 쉼표는 줄어들고 느낌표만 남는다. 그러나 그 속도 속에서 예전 영화가 보여주었던 깊은 맛은 없다.



한때 영화는 느림의 예술이었다. 긴 도입부와 조용한 장면들은 예술이었다. 그것은 관객의 감정을 천천히 데우는 시간이었다. 마지막 장면의 울림을 위해 한 겹 한 겹 쌓아 올리는 과정이었고, 그 느린 설렘이 있었기에 정점의 감동은 더 벅찼다. 하지만 지금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 많이 다르다. 그리고 또 대신 다른 소비 방식이 등장했다. 유튜브에서 영화 요약본을 만드어낸다. 영화의 앞부분은 설명으로 요약하고, 가장 재미있는 장면만 편집한 짧은 영상이 영화 한 편을 대신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 틈을 내기에는 적당한 분량이지만, 그 압축된 시간 속에서 차분히 쌓아 올린 감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관객의 성향이 요즘 많이 달라졌다. 장면 하나하나를 곱씹기보다 즉각적인 자극을 소비하는 데 익숙해졌다. 속도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요즘은 책을 구매하는 독서 문화도 많이 달라졌다. 두꺼운 책은 잘 팔리지 않는다는 말이 출판계에서는 공공연하다. 긴 대하소설을 찾는 것보다 한 권의 장편소설을 선호한다. 이제는 얇은 단편소설집이 더 합리적으로 소비된다. 시집 역시 마찬가지다. 여러 편의 시를 묶어내던 방식 대신, 더 얇고 더 가벼운 책을 독자는 선호한다. 효율과 경제사정이 독자의 취향을 바꾸고 있다.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뭐든 속도는 내야 하는 세상이고, 효율을 무엇보다 따진다. 느림은 뭔가 뒤처짐이 된다. 그러나 너무 빠른 속도는 시간의 깊이를 점점 얇게 만든다. 긴 이야기를 따라가던 집중력은 사라지고, 문장을 곱씹던 사유의 시간도 그만 스쳐 지나간다.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그보다 더 압축된 시간으로 흘러가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그렇기에 지금 정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를 더 빠르게 확보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장면을 깊게 오래 사유하는 시선이 아쉽고, 한 문장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빼앗긴 시대가 아닐까. 속도를 잠시 늦추고, 끝까지 머무를 용기를 내는 것. 영화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책 한 권을 서둘러 넘기지 않고 읽어 내려가는 일. 그 느린 시간 속에서 깊고 소중한 삶의 결을 느끼게 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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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은 뒤처짐이 아니라, 깊어짐이다. 빠르게 지나친 것들 사이에서 놓쳐버린 감정과 생각을 다시 불러오는 힘이다. 모두가 앞만 보고 달릴 때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 그것이 삶을 풍요하게 한다. 한 편의 영화처럼, 한 권의 책처럼, 하루가 그렇게 천천히 쌓여갈 때 내게 오래 남는 울림은 깊어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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