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저리 가지 못해. 어디다 머리를 들이밀어?" "어머, 여기가 어디라고 끼어들어요. 어서 다른 데로 가세요." "이 자린 임자가 따로 있어요. 아, 저기 오네요." "어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어요? 사정은 딱하기는 한데 나도 내 코가 석자라 도와주지는 못하겠구려."
층층이 쌓여 있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한 무리의 문제집들이 책꽂이 사이를 비집고 들며 한자리 차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엄동설한 여기저기 쫓겨 다니며 이미 누더기나 다름없는 다 찢어져 가는 표지와, 언제 닦았는지 모를 먼지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한때는 새로 나온 베스트셀러 신간 도서들도 제칠 만큼 이 집 주인 여자의 사랑과 귀여움을 톡톡히 받던 문제집 들이었다. 언제 어떻게 이 문제집들이 이렇게 되었는지는 주인 여자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엄마표 공부를 하겠다며 야심 찬 포부를 내세우던 시절, 좋다는 문제집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넷 서점으로부터 배달되어 왔다. 내로라하는 책들을 다 제끼고 책꽂이 정 중앙에 자리를 떡하니 차지할 정도로 주인 여자는 애지중지하였다.
우리 책들은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눈만 떴다 하면 이 문제집들과 늘상 함께 하였고, 결코 채점이 밀리는 법이 없었다. 그랬던 문제집들이 한순간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주인 여자의 발등으로 이리저리 치이며 책꽂이 한 칸 차지 못하는 처량하기 짝이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쯧쯧쯧, 안 됐다 정말." "그러니깐, 이 추운 날씨에 대체 갈 때가 어디가 있다고 저렇게 방치를 한담." "제네들이야 다 풀리면 버려질 신세잖아. 버려지기만 해? 문제집 곳곳에 낙서며 밑줄이며, 아이고 말도 마. 나는 다시 태어나도 문제집으로는 절대 태어나고 싶지 않아. 차라리 이렇게 두고두고 볼 수 있는 고전 소설이 속 편하고 제일이지." "하긴 성적이라도 못 나와 봐. 저 문제집들이 무사할 성싶어? 어후, 난 생각만으로도 몸이 떨려. 제네들 매일 살얼음판 같은 마음으로 어떻게 산다니. 불쌍하기는 하다."
"벌써 석 달이 넘게 저렇게 방치되며 채점 한 번을 안 했대." "어머, 정말이야? 난 그 정도 일 줄 꿈에도 몰랐네. 저 집 애들 공부는 다 망했네 망했어." "그렇지도 않은가 봐. 우리들을 마르고 닿도록 읽게 해서 아주 공부를 못하는 것 같지는 않더라고. 저번에 애들이 학교에서 수행평가 본 거 살짝 보았는데 '매우 잘함' 받았더라고. 그중에서 국어는 단언 으뜸이던데?"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아직 우리가 쓸모 있다는 얘기잖아.
옆에서 귀동냥으로 몰래 엿듣고 있던 문제집들은 마음의 결심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려면 저 집 아이들과 책들을 반드시 떨어뜨려 놓아야 돼. 그래야 우리가 살아. 아주 재미없고 재미없는 백과사전을 매일 같이 들이 대서 애들이 책과 멀어지게 해야 돼. 그래서 성적을 떨어뜨려 놓는 거야. 애들 성적이 떨어지면 반드시 저 집 주인 여자는 우리를 다시 찾을 거야.' 하며 문제집들은 굳은 다짐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