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집들의 반란.

수상한 책 들 3

by 글쓰기 하는 토끼


"야, 저리 가지 못해. 어디다 머리를 들이밀어?"
"어머, 여기가 어디라고 끼어들어요. 어서 다른 데로 가세요."
"이 자린 임자가 따로 있어요. 아, 저기 오네요."
"어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어요? 사정은 딱하기는 한데 나도 내 코가 석자라 도와주지는 못하겠구려."

층층이 쌓여 있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한 무리의 문제집들이 책꽂이 사이를 비집고 들며 한자리 차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엄동설한 여기저기 쫓겨 다니며 이미 누더기나 다름없는 다 찢어져 가는 표지와, 언제 닦았는지 모를 먼지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한때는 새로 나온 베스트셀러 신간 도서들도 제칠 만큼 이 집 주인 여자의 사랑과 귀여움을 톡톡히 받던 문제집 들이었다. 언제 어떻게 이 문제집들이 이렇게 되었는지는 주인 여자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엄마표 공부를 하겠다며 야심 찬 포부를 내세우던 시절, 좋다는 문제집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넷 서점으로부터 배달되어 왔다. 내로라하는 책들을 다 제끼고 책꽂이 정 중앙에 자리를 떡하니 차지할 정도로 주인 여자는 애지중지하였다.

우리 책들은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눈만 떴다 하면 이 문제집들과 늘상 함께 하였고, 결코 채점이 밀리는 법이 없었다.
그랬던 문제집들이 한순간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주인 여자의 발등으로 이리저리 치이며 책꽂이 한 칸 차지 못하는 처량하기 짝이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쯧쯧쯧, 안 됐다 정말."
"그러니깐, 이 추운 날씨에 대체 갈 때가 어디가 있다고 저렇게 방치를 한담."
"제네들이야 다 풀리면 버려질 신세잖아. 버려지기만 해? 문제집 곳곳에 낙서며 밑줄이며, 아이고 말도 마. 나는 다시 태어나도 문제집으로는 절대 태어나고 싶지 않아. 차라리 이렇게 두고두고 볼 수 있는 고전 소설이 속 편하고 제일이지."
"하긴 성적이라도 못 나와 봐. 저 문제집들이 무사할 성싶어? 어후, 난 생각만으로도 몸이 떨려. 제네들 매일 살얼음판 같은 마음으로 어떻게 산다니. 불쌍하기는 하다."

"벌써 석 달이 넘게 저렇게 방치되며 채점 한 번을 안 했대."
"어머, 정말이야? 난 그 정도 일 줄 꿈에도 몰랐네. 저 집 애들 공부는 다 망했네 망했어."
"그렇지도 않은가 봐. 우리들을 마르고 닿도록 읽게 해서 아주 공부를 못하는 것 같지는 않더라고. 저번에 애들이 학교에서 수행평가 본 거 살짝 보았는데 '매우 잘함' 받았더라고. 그중에서 국어는 단언 으뜸이던데?"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아직 우리가 쓸모 있다는 얘기잖아.

옆에서 귀동냥으로 몰래 엿듣고 있던 문제집들은 마음의 결심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려면 저 집 아이들과 책들을 반드시 떨어뜨려 놓아야 돼. 그래야 우리가 살아. 아주 재미없고 재미없는 백과사전을 매일 같이 들이 서 애들이 책과 멀어지게 해야 돼. 그래서 성적을 떨어뜨려 놓는 거야. 애들 성적이 떨어지면 반드시 저 집 주인 여자는 우리를 다시 찾을 거야.'
하며 문제집들은 굳은 다짐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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