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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Jan 01. 2021

분노와 질투의 사이 어딘가

 매년 12월 31일 자정이 되면 호찌민시의 랜드마크 81에서는(이 도시에서 제일 높은 건물) 15분간 불꽃놀이를 한다. 산이라고는 없는 도시라서 어지간한 거리에서는 다 보이는 불꽃인데도 건물 바로 밑에서 치어다보려는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어 그 일대가 해마다 마비가 된다. 한국이나 유럽과 달리 호찌민시에는 코비드 19 확진자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이번 해에도 여지없이 불꽃놀이는 진행될 예정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제일 높은 건물 옆에 일터가 있는 관계로 직원들과 일찌감치 일을 마감하고 탈출계획을 세웠다. 불꽃놀이는 자정이니 7시 언저리 시간에는 빠져나갈 수 있으려니 했는데 판단 착오였다. 랜드마크 81이 위치한 빈홈 센트럴 파크에는 단 두개의 출입구가 있는데 이미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차량을 통제하고 있다고 했다. 그 탓에 나를 픽업하려던 지넌군은 아예 단지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했다. 같이 일하는 D에게 오토바이로 빈홈 센트럴 파크 바깥으로만 일단 태워다 달라고 부탁을 했다.


D의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단지 출구 쪽으로 가서 봤더니 이미 난리는 시작되었다. 차량을 통제하는 탓인지 차와 오토바이 없이 사람들이 좀비 떼처럼 랜드마크 81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곳곳에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호찌민시의 경찰은 거기로 다 모인 모양이었다. 헬멧을 쓰지 않은 나는 혹시나 잡힐 까 봐(헬멧 미착용은 소매치기보다 중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음이 조마조마했고 D는 경찰 없는 출구를 찾느라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안에서만 몇 바퀴를 돌았다. 결국 D가 '더 이상은 안 되겠어. 경찰에게 걸리겠어'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바람에 오토바이에서 내려 길거리에 덜렁 혼자 선 신세가 되었다.


집이 먼 D를 등 떠밀어 보내고 (그녀는 진짜 괜찮겠냐고 여러 번 물었지만 안 괜찮을 이유란 뭐란 말인가) 도저히 그 난리 통에서 지넌군과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그에게는 사이공 다리 너머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사이공 다리를 걸어서 건너기로 마음먹는 것 까지는 좋았다. 운동화를 신고 건널 때와는 사뭇 다를 거라는 걸 예상했지만 걸어도 걸어도 다리가 끝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뒷굽이 무거운 뮬을 신은 발도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 옆을 떼 지어 씽씽 달려가는 오토바이가 일으키는 먼지바람 탓에 입에서 모래가 씹힐 지경이 되자, 그깟 불꽃놀이 보겠다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향해서 욕이 쏟아져 나왔다. 그 긴 다리를 건너는 도중에 빈둥거리며 잡담을 하고 있는 경찰 무리를 다섯 팀 이상을 만났다. 그들도 그렇게 꼴 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이게 재밌어? 지나치게 소모적인 거 아냐? 이 난리가 다 고작 15분 하는 불꽃놀이 때문이란 말인가?


20여분 걸었겠지만 마음과 몸은 2시간 걸은 것처럼 녹초가 되었다. 지넌군을 만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침묵을 지켰다. 입을 열면 누구에게라도 화를 낼 것 같았는데 지넌군 밖에 없으니 그에게 화염을 쏟아 낼 게 뻔했다. 지넌군이 무슨 죄란 말인가. 입을 닫아야지. 불꽃놀이를 보겠다고 곳곳에 장사진을 이룬 사람들의 모습이 차창밖으로 휙휙 지나갔다. 시계를 봤더니 8시 33분이었다.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플라스틱 의자들을 가져다 놓고 벌써부터 자정을 기다리고 있는 한결같이 들뜬 표정의 사람들.


그러다가 문득, 저리도 행복한 사람들과 달리 나는 지독히도 심통이 나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같은 이유로 그랬다. 그놈의 불꽃놀이 때문에 저들은 들떠 난리고 반면에 나는 화가 나서 말을 하기 싫을 지경이다.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냐?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행복한 표정으로 몇 시간이고 불꽃놀이를 기다리겠다는 저들이 슬며시 부러웠다. 친구들끼리, 연인끼리, 가족끼리 걸어서 랜드마크 81로 모여드는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 화나고 우울한 표정의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 나 혼자만 화가 나있다.


똑똑, 환하게 웃는 낯의 남자가 내가 앉은 차의 창문을 두드린다. 팔에 그의 딸인 것 같은 여자아이가 매달려서 웃고 있다.

'왜요?' 내가 차 창문을 내린다.

'왜 거기 앉아 있어요?'

'집에 가려고요'

'화가 난 것 같아 보여요.'

'그러게요 화가 난 것 같아요.'

'무엇 때문에요?'

'그게.. 그걸 모르겠어요. 난 왜 화가 난 걸까요?'

'새해 복을 빌면서 불꽃놀이를 보는 건 어때요?'

'하지만 난 사람들 많은 게 싫어요.'

'불꽃은 어디서나 보여요. 당신이 있는 자리에서 봐요.'

'그래요. 그래야겠어요.'

'해피 뉴 이어'

'해피 뉴 이어'


바깥에 선 사람이 되어 안의 나를 들여다보았더니 감정조절 못하는 이상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제서야 입이 떨어졌다. '오늘 저녁은 뭐 먹어?'


그 어떠한 사소한 것에서라도 기쁨을 찾아 행복을 느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행복을 소명으로 여기는 건 강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다. 우리 모두는 슬프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어쩌다가 행복하게 웃는 날도 당연히 있고 그런 날들 때문에 다른 날들의 어려움을 이긴다.


자정이 되자 폭죽 소리가 나고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창문의 블라인드를 올리자 랜드마크 81에서 쏘아 올리는 불꽃들이 조그맣게 보였다. 내가 저곳에 있지 않고 내 방에 앉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파를 뚫고 그곳을 찾아가 불꽃을 치어다보며 환호하는 저들의 즐거움을 함께할 의지가 내게는 없다는 것 때문에 질투 비슷한 게 느껴졌다. 저들은 언젠가 닥칠 슬픔을 이길 즐거운 기억을 오늘 한 개씩 더 갖게 되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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