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다는 것에 대하여

광야에서의 새벽

마치 봉화대에 오른 것처럼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오르다 보니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눈이 쌓인 길이 나왔고 비탈이 진 그곳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캐나다 밴쿠버의 산은 3월 초순이라고 해도 얼음눈이 쌓인 곳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라 쌀쌀했다. 끝도 없는 침엽수림, 이끼 낀 나무들이 툭 툭 쓰러져 있는 골짜기, 손을 담그면 쨍하고 손이 얼어버릴 것 같은 계곡의 물, 울퉁불퉁 자갈길이 전체적으로는 잘 어우러지고 너그러운 아버지의 품 같지만 개별적으로는 삶의 골짜기에서 만나는 장애물들처럼 마냥 친절하지만은 않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산새 우는 소리 듣기는 더 힘들고 들꽃을 좋아할 것 같은 작은 동물들도 별로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고향을 등지고 캐나다라는 타국으로 떠나 왔으면서도 우리는 따뜻한 둥지를 뒤로하고 자주 이렇게 떠나온다. 히말라야, 티베트 등 쉽사리 사람의 손길을 허락하지 않는 곳을 동경하는 남편과 뒤늦게 한 가지 취향이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렇게 떠나는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도 달라서 서로 다른 행성에서 온 우주인들처럼 각자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소통을 했었다. 원하는 것도 달랐기에 서로 이야기할 때에는 고함을 쳐야만 알아들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많이 깨지고 부서져서 다시는 완성품으로 조립을 할 수 없을 것 같이 조각 조각난 순간도 있었다. 그런데 갈 곳까지 다다른 어느 순간부터 할 수없이 자신에게 있던 바램들을 조금씩 내려놓으면서 달라졌다. 더욱이 자연이 개입을 하는 곳에 다다르면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서로를 바라보게 되니 시선에 동정심이 깃든다.


캐나다는 벌목을 많이 해서인지 어딜 가나 산속에 길이 뻥뻥 뚫려 있지만 삭막한 광야가 연상되게 벌목의 현장은 처참하다. 그런 광경 앞에서 서로에게 쌀쌀맞았던 우리라도 서로를 의지 할 수밖에 없다. 의지하려면 서로 돕는 수밖에 없다. 눈이 쌓여 미끄러운 지면에 미끄러지면서도 재빨리 텐트를 치고 한시가 아까워 장작불 먼저 피운다. 한편으로는 몸도 녹일 겸 라면도 끓이고 저녁으로 포일에 싼 연어도 구웠다. 아웅다웅 다투는 부모를 만났어도 공손하게 잘 자라 준 아이도 부지런히 움직여 함께 캠핑이라는 합작품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묶는 땅은 영지 (Crown land)라고 부르는 나라 땅으로 예약과 비용없이 자기 책임하에 14일간은 자유롭게 캠핑을 할 수 있다. Covid 19의 일상이 길어지면서 우리처럼 자연의 품에 안겨 치유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마침 시니어들이 ATV 3대에 나누어 타고 올라와 산 위로 더 올라가려다가 눈 때문에 포기를 하고 우리에게 V자로 행운을 빌어주고는 내려간다. 또 아들을 태우고 온 아버지가 망원경으로 이곳저곳을 알려주는 모습도 보인다.



바람이 산 정상에서부터 불어올 때에는 차가운 공기의 흐름 때문인지 연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폭포수처럼 떨어져 산 아래로 멀어져 간다. 머리는 차갑고 몸은 데워지기 시작하니 몸이 둘로 나누어지는 듯 감각이 새로워지며 의식이 또렷해졌다. 아무런 요동도 없이 한결같이 넉넉한 자연을 바라보니 무겁게 나를 누르던 내 삶의 문제들도 괜찮아질 것 같은 초긍정 마인드가 된다. 가볍게 창공으로 날아올라 애드벌룬을 타고 그런 하늘의 축복을 배달해주고 싶었다. 애써 말하지 않아도 타탁 타닥 타오르는 불꽃이 부실한 우리들의 언어를 뛰어넘어 서로의 마음에 스며든다. 그 불빛에 어른거리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내 것이나 네 것이나가 따로 없다. 타오르는 장작불에 감자를 구워 먹으며 밤을 보내고 있었다.



칠흑 같은 밤에 하늘의 별들이 내려앉은 듯 금빛으로 마을 전체가 출렁대는 것처럼 보였다. 멍에를 어깨에 짊어진 사람들도 모두 내려놓고 숙면을 취하기를 바랬다. 밤의 안식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룻밤의 안식으로 다음날 더 상쾌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의 섭리가 신비스럽게 다가와 감사했다.


내가 켜 둔 불빛도 저렇게 보였을 것이다. 가슴 한편에 싸아하고 먹먹한 느낌이 밀려 들어온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나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애처롭지만 한편으로는 대견하다. 삶을 바로 곁에 두고 현미경으로 보듯이 보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가깝게 바라볼 때에는 도무지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적으로 다른 공간에 와서 바라보면 똑같은 무게와 질량을 가진 문제라도 한결 더 여유 있게 바라보게 된다. 삶의 무대에서 직접 서서 연기할 때와 청중으로 편안하게 앉아 그런 나를 바라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싶었다. 휴식은 삶의 달콤한 순간을 알려주므로 그 휴식의 순간을 더욱더 누리려면 일상에서 가끔은 멀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드디어 새벽녘이다. 모두가 웅크리고 돌아서 잠들어 있는 그 시간 홀로 깨어 일어나 앉았다. 동쪽 하늘이 불이 붙은 듯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광명체가 떠오르면서 근처에서 보랏빛으로 물들던 구름들이 물결처럼 빠른 속도로 온 천지로 삽시간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빛의 물결이 순간순간 확장되는데 바람이 들러리를 서면서 더욱더 그 빛을 빠르게 빈 하늘로 실어 나르며 채워나갔다. 일분이 다르게 하늘의 모습은 변화무쌍하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보랏빛과 어우러져 불타오르는 하늘을 바라보며 저절로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를 했다.


저 아래쪽 대지에도 빛이 떨어지니 깨어나기 시작한다. 맑은 것들이 가장 먼저 삶을 알아차리고 기지개를 켤 것이다. 호수 속의 생명체들도 곧 빛이 있는 곳을 향해 머리를 내밀리라. 창문을 여니 차가운 바람이 머릿결을 쓰다듬듯 스쳐 지나갔다. 그런 새벽바람은 절대 손으로도 무엇으로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다시 만나려면 다시 오를 수밖에 없다.


눈앞에 있는 것들을 마음껏 그리워하며 소중하게 대하는 법을 배운다. 영광스러운 존엄이 드 넓게 꽉 찬 공간에서 새벽을 맞이하면 삶 자체가 놀라운 기적임을 더 깨닫게 된다. 기적 같은 현실을 살고 있다는 자각이 드는 것이다. 서서히 오렌지빛으로 바뀌던 하늘이 곧 푸르게 변했다. 이제 익숙한 풍경이 하나둘씩 펼쳐진다. 여기저기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누군가 새벽을 뛰어넘어 분주한 아침으로 넘어가 밥을 짓고 아이들을 깨울 것이다.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는 것을 창조라고 했던가? 창조의 순간은 매일 모두에게 동일하게 다가온다. 살아있는 생명체 누구에게든 찾아오는 신성하고 거룩한 시간인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누구나 창조적일 수 있다. 수십수백의 의태어와 의성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움직임들을 느껴 볼 수만 있다면 말이다. 눈으로 보이지 않은 거룩한 존재가 엄연하게 허공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으며 그 눈길은 거부할 수 없게 압도적이다. 그 위대한 존재의 입김이 바람이 되어 우주에 떨림이 있게 한다. 같은 나무의 나뭇잎들이 각기 다른 각도로 춤을 추며 살랑 거리는데 이것이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아닌가 했다. 그러다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어져 땅에 쌓여 나무의 거름이 되어 가야 할 시간은 기어코 또 누구에게나 오고야 말 것이다.


삶을 두려움 없이 편견 없이 볼 수 있게 돕는 자연으로 떠나는 계절이 다가왔다. 이렇게 때에 따라 계절을 주시고 때로는 순응하고 때로는 뛰어넘으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하다.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늘 삶의 무게나 고통의 질량보다도 훨씬 더 크다. 사나 죽으나 언제나 함께 해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채워진 가슴을 안고 다시 개별적인 삶으로 내려가 살아갈 것이다. 잔뜩 싸 짊어지고 왔던 것들은 늦은 밤까지 장작불에 넣어 말끔하게 태우는 의식을 치렀다. 아버지의 품 같은 자연으로 돌아올 수 있기에 다시 자연으로부터 떠나며 집으로 돌아가서는 또 집으로부터 떠나 자연으로 가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삶은 늘 회전하므로 한자리에 머물기만 해서는 변화하는 자연의 섭리 속에 있는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짐을 자꾸 사는 모양이다. 그렇게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그곳이 있기에 나는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