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구두

기다려 주세요.

by 스토리텔러 레이첼


"아무도 나와 보지를 않더란 말이죠?"

"그래, 글쎄 그렇더라니까, 어떻게 아무도 나와 보지도 않았을까?"


분이는 그 동네에서 제일 먼저 서울이라는 객지로 간 처녀였다. 다소곳한 성격과 고운 외모에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6.25 전쟁 후 궁핍이 온 땅 위에 구름 그림자가 드리우듯 퍼져나갔고 그 여파는 아이들이 많은 분이네 집에 더 컸다. 분이의 집, 이씨네는 강원도 오지 산골에 있었다. 비록 논밭으로 써먹을 수 있는 전답은 있었으나 소출은 마땅치 않았다. 그 시절 어디나 마찬가지였지만 해마다 겨울을 나려면 분이 부모의 입이 쩍쩍 마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분이네는 10남매였는데 아들이 둘 딸이 여덟이었다. 분이는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던 셋째 딸이었다. '서울에서는 돈을 잘 벌 수 있다'라는 말에 분이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용수철처럼 튀어 그곳으로 갔다. 그러다가 서울에서는 제일 크다는 방직공장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거기서 시골에서는 언감생심 생각할 수도 없는 돈을 벌 수 있었다. 분이는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 힘든 줄도 몰랐다. 그래서 월급을 모두 시골집에 가져가는 재미로 열심히 일했다.


효성스러운 분이는 가급적 시간을 내어 시골에 내려가려고 했다. 시골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원주근처 동화 역에서 내려 하루에 두 번밖에 없는 버스를 타야 했는데 그러려면 구둣발로 많이 걸어 다녀야 했다. 어둑해져서 시내버스 종점인 면 소재지에 도착하고 나서 산중에 난 오솔길을 따라 두어 시간을 걸어야 했다. 그래도 다 큰 예쁜 처녀가 다니기엔 사람이 없는 산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마지막 장자울 고개를 넘어 집에 도착할 즈음이면 분이 볼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못 보던 가족들에게 줄 선물과 월급이 있었기에 분이는 마음이 몸보다 더 빨리 달렸다. 분이는 슬그머니 돈 봉투를 부모님께 건넸다. 그러고는 마치 자기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생생도 못 내고 그저 죽은 듯이 있다가 일터로 돌아가곤 했다.


분이가 그때 억지로 자장가를 부르면서 재웠던 이야기들이 마음속 어디선가로부터 깨어나 다시 칭얼대기 시작한 것은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 비로소 한숨 돌리고 나서다. 앉기만 하면 분이는 딸들에게 마치 두루마기 휴지에서 휴지를 뽑듯 이야기를 뽑아냈다. 분이가 자꾸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반복하는 것은 분이 인생이 존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분이가 드나들 때 누구도 이러니 저러니 반가운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랜만에 마당에 들어서는 셋째인데 누군가가 두 팔을 벌려 반겨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분이 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고 했다. 하물며 부모님은 따뜻한 구들 목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듣고 싶었던 딱 한마디를 못 들어서 분이의 가슴에 응어리가 생긴 것이다.




분이가 살아갈 당시에는 운동화도 없었다. 운동화가 먼저 나온 것이 아니라 구두가 나오고 운동화 패션이 그 후에 온 모양이다. 구두를 신고 그 산길을 걸어 다닐 생각을 했다니, 분이는 젊었기에 그렇게 착할 수 있었나 보다. 여름에 그 길을 걸으려면 신발 가득히 이슬이 고여서 꾸덕꾸덕 소리가 났다. 겨울이면 구두가 얼어붙어서 버적버적 소리가 났다. 언 구두가 발을 보듬어 줄리는 만무했기에 발이랑 구두랑 따로 돌았다. 그때는 왜 그리 추웠는지 모른다고 했다. 지금처럼 오리털 잠바가 있었을 리도 만무했다. 분명 코트가 전부였을 텐데 추운 날 칼바람이 엷은 코트를 그냥 두었을 리가 없다. 분이가 가는 길은 그 시절에는 더군다나 아무도 드나들지 않던 오지 길이다. 가는 길에 공동묘지가 있고 승냥이와 같은 짐승도 많은 곳이었다. 젊었던 분이는 힘든 줄도 몰랐고 기운이 빠진 지금에야 그때 그곳을 넘어 다니던 기억이 올라와서 헉헉거린다. 고구마를 먹다가 목에 걸린 것처럼 목이 멘다고도 했다.


마땅히 들어야 할 말, 받아야 할 관심을 받지 못했던 분이의 이야기가 귀에 박힌 것 같다며 가끔 딸들은 불평을 한다. 한 이야기 또 하고 더 하니 지친다고 한다. 분이는 왜 그때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행스럽게도 누군가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서이다. 제일 먼저 들어주는 사람은 '당신'이고 그리고 가끔은 타인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면 바리바리 명절 선물을 양손에 챙겨 들고 먼 길을 나섰던 분이는 두둑한 월급봉투를 집에 내밀면서 얼마나 좋아했을까 싶다. 두메산골의 궁핍은 땅을 파서 해결되지 않았다. 씨앗이 없어 뭔가를 잘 심을 수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칡뿌리 씹어 먹고 고사리만 삶아 먹으면서 살 수는 없었기에 분이의 월급은 가족들의 상에 한 알의 밥풀때기라도 더 올릴 수 있었다.


분이가 그 월급을 모아두었더라면 그때 시세로 웬만한 작은 집을 살 수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 어리고 순진했던 분이는 그때 대부분의 딸들이 그랬던 것처럼 경제관념이 없었다고 한다. 분이의 월급봉투는 분이의 구두가 닳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없어졌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빠른 것은 또 없을 것이다. 세월은 모든 것을 꿀꺽해버렸다. 분이는 요즘 하나둘씩 자신이 온 정성을 다해 섬겼던 형제자매가 시간이 흐를수록 떠나 버리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치매와 암 때문에 2명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열심히 살 만큼 살아 이 세상에 아쉬울 것도 미련도 없다며 죽음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분이도 이제 85번째 생일을 맞은 게 얼마 전이다.




분이의 이야기는 끝날 것 같으면서도 끝날 수가 없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던 이야기들이 고구마 줄기에 달리 고구마처럼 쭈르르 따라 나오는 형색이다. 분이는 서러움과 아쉬움을 자꾸 불러들인다. 집을 나설 때마다 누군가는 한 번쯤 나와서 살뜰하게 배웅을 해 주기를 바랐던 마음이 아직도 유효하다. 새벽에 눈앞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거무스레한 산을 타 넘고 가야 하니 아침부터 채비를 했을 것이다. 그 길을 가려면 잘 다녀가라는 말, 따뜻하게 손잡아 주는 사람의 얼굴이 필요했을 터이다. 분이는 집을 떠나며 적어도 여러 번은 뒤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싸리 빗자루로 곱게 쓸곤 했던 흙마당을 가로지르며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떼면서 퇴청 마루에 서서 누군가는 배웅을 해주며 딱 한마디만 들을 수 있었다면 분이는 어땠을까 싶다. 그러나 고요한 적막 속에서 자신을 위로해 주는 것은 뜨겁게 자신의 입에서 나오던 입김뿐이었다. 입김은 뭐든 할 수 있다고 응원을 해주는 것 같았고 산을 넘을 때 얼굴을 살짝 때려주던 나뭇가지들이 차라리 친절한 위안이 되어 주었다.


버스를 탈 수 있는 면으로 나가려면 족히 두어 시간 이상은 걸리는 길이었다. 분이는 쓸쓸한 마음을 달래듯 손을 후후 불어가며 산기슭을 올랐다. 일단 오르기 시작하면 끝을 향해 가게 된다. 출발했기에 도착지에 도착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르긴 몰라도 장자울 고개를 넘어서 동네가 어슴푸레 보이는 커브길에 들어서면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듯이 구둣발로도 우루루르 소리를 내며 아랫길로 내리 달렸을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먼발치에 서서 손을 흔들어 주었더라면 그 길에 콧노래를 부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지만 때론 무관심이 생에 대한 오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랬기에 더 인정받고 싶어서 더 좋은 딸이 되고 싶어서 지금까지 꼿꼿하게 버텨왔나 보다. 분이 때문에 온 집안 식구들이 얼마간이라도 배부르고 입가에 웃음기가 돌 수 있다면 그게 뭐 대수냐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 분이의 월급은 한 달에 십만 원이었다고 한다.


분이가 처음 서울로 갔을 때 누군가의 소개로 신당동 중앙시장에 가게를 7개나 소유했다던 어떤 장군의 밑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제일 크다던 방직공장에 취업을 하고 나니 여기저기서 손을 내밀던 식구들도 많았다고 한다. 군인 간 오빠도 돈을 빌려달라고 했었고 그 외에도 형제자매들에게도 솔솔치 않게 용돈을 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분이가 결혼 후 힘겹게 살 때에 형제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는데 특별히 엄마 바로 아래 동생으로부터다. 분이가 언 구둣발로 시골집을 찾으며 마치 제비가 자기 새끼 먹이듯이 먹잇감을 물어다 주었던 것처럼 분이도 보살핌을 받아야 할 때가 있었던 것이다. 가엾게도 분이는 결혼 후 친정마을로 1남 5녀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날아들었다. 책임감 많은 분이가 결코 원하지 않던 상황이 온 것이다. 없는 살림에 친정 더부살이를 해야 하던 그때가 분이 에게는 가장 힘든 때였다고 한다. 하지만 분이는 그래도 자연에 둘러싸여 아이들을 보호하며 살 수 있었던 시골에서의 삶이 있어 지금의 우리가 있다고 했다. 분이의 부모는 분이가 들어가고 나갈 때 제대로 이렇다 저렇다 내색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분들은 말은 하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라고 믿었던가 보다. 분이가 고생스럽게 번 월급봉투를 내밀 때에도 그랬지만 분이가 역경으로 점철된 결혼생활을 할 때에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분이가 서울로 향하기 위해 퇴청 마루를 미끄러지듯이 빠져나갈 때 아마도 분이의 부모님은 이불속에서 가엾은 딸자식이 새벽을 뚫고 서울이라는 전쟁터로 나가는 소리를 듣고 있었을 것이다. '에이그 내 자식 고맙다 잘 다녀오너라' 그 한마디가 어려웠었나 보다. 귀한 셋째 딸이 동트는 새벽에 부스럭거리며 나가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부모로서의 죄책감 때문에 얼어붙은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싶다. 이래저래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 속이 어땠을지를 생각해 보면 가슴이 저며온다. 분이는 내 어머니이시고 분이의 부모님은 나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되신다.


자식은 표현되지 않은 사랑에 대해서는 모르는가 보다. 80이 넘고 90에 가까워지는 나이라고 해도 부모로부터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비록 마음속에 들끓었어도 표현을 하지 못했다면 사랑이 아니다. 적어도 자식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때로는 표현했어도 같이 크는 다른 자녀에 비해 분량이 적었다면 또 그것이 문제가 된다. 비교를 할 때는 받은 사랑은 기억이 안 나고 받지 못한 사랑만 기억이 난다. 친정 곁으로 돌아갔던 분이는 1남 6녀 중 막내딸을 거기서 출산을 했다. 어머니의 친정 더부살이 삶을 바라보던 외할머니의 마음을 한 번이라도 보듬어 드리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는 어머니를 보며 사느라 바빠 아무것도 못한 손녀딸인 내 마음도 아프다. 오래전 한국에 갔을 때 단 한 번 '회'를 사드린 적이 있었는데 두고두고 고마워하셨다는 나의 외할머니, 오래전에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


분이의 이야기는 우리들 앞에서 끝날 줄 모른다.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듣고 글로 남기려 한다. 어머니는 다복한 노후를 보내시는 편이다. 캐나다에 사는 둘째인 나를 제외하고 딸과 아들이 가까이 살며 주말에 들른다. 5월이 되니 어머니의 날이 있어 분이는 꽃에 둘러싸여 꽃분이가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번갈아 분이를 찾는 딸과 사위들은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챙겨 가지고 와서 노래도 불러 드린다. 둘째 딸은 캐나다에 살아서 늘 마음뿐이었다. 가끔 전화를 드려 어머니의 내면에 상처로 남은 이야기를 들어 드리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질문을 드리니 몰랐던 이야기가 끝도 없이 나온다. 이런 삶을 사셨다니 가슴이 미어진다.




내 어머니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는 사뭇 다르시다. 신세대라서 그런지 사랑 표현도 잘하신다. "사랑한다. 우리 딸, 엄마는 너를 믿어. 어디서든 어떤 일이 있어도 잘 살아갈 거야. 엄마라는 존재는 산 골짜기 계곡의 골짜기에 배를 동동 띄울 만큼 눈물을 흘릴 때도 많단다. 엄마는 또 공동묘지를 지날지라도 아이만 안고 가면 하나도 무섭지 않단다. 그러니 너도 용감해져야 해. 우리 딸, 사랑해. 사랑해. 아이 러브 유"



1남 6녀를 지키시며 살아온 어머님의 고군분투 인생 에너지를 닮아서인가 우리들 모두 그 누구에게 뒤질세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부지런하고 씩씩한 것을 보면 딱 그 엄마의 딸과 아들이다. 나의 어머니는 스스로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지켜낸 용감한 여성이다. 그 시절을 살아내면서 얻은 산물인 천근만근 무거운 걱정 근심을 내게 유산으로 남겨주기는 하셨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어디를 가도 따사롭게 우리를 비추는 햇살 같다. 요즘 어머니는 우리들을 위한 기도를 하려 해도 자꾸 까먹는다고 푸념하신다. 어머니의 그 마음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그런 어머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을 희생했던 어머님의 은혜에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지 멀리 살아 효도를 할 수 없었던 둘째 딸은 궁여지책으로 이렇게 글로나마 표현해 본다. 5월은 가정의 달, 나의 어머니 꽃분이 여사께 이 글을 읽어드리려고 한다. 그러면 어머니의 마음속의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어질까 싶다.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은 없는 것 같고 사실 사랑은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보시도록 해 드려야겠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불러도 불러도

보고 싶은 나의 어머니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합니다.


캐나다에서 둘째 딸 올림






이 글은 어머니께 구두 한 벌 사드리지 못한 못난 딸의 사모곡이다.

코로나 물러 날 때까지 기다려주실 수 있을지 몰라 마음이 초조해진다.






© charissek, 출처 Unsplash (구두 사진 빌려온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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