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스토리텔러 레이첼
Sep 24. 2023
카페, 카페, 카페, 한 번만 말하고 싶지 않다. 여러 번 되뇌고 싶다.
나는 카페의 사회적 역할을 사랑방 역할로 규정한다. 어릴 적 아랫목에 누워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안 하던 옆집 아저씨 같은 불청객 말고 화롯불 옆에 둘러앉아 남편 흉을 맛깔나게 보던 동네 아줌마들 생각이 나서다. 나 역시 카페에 가면 영락없이 옆 테이블의 사람이 듣건 말건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밴쿠버에선 옆 테이블이 한국 사람일 경우가 드물어 더 좋다. 하지만 요즘엔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도 많으니 조심은 해야겠지.
한국은 카페 천국이다. 병원 천국, 시장 천국, 음식 천국, 그러고 보니 한국이 천국이다. 밴쿠버를 999당에서 1당을 뺀 곳이라고 하더니 요즘엔 그 말이 별로 들리지 않는다. 높아진 물가, 비싼 렌트비, 허덕이는 사람들이 늘고 부자가 더 부자가 되는 곳으로 변하고 있어서이다.
특별히 경복궁 근처에서 본 어느 카페 앞에서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담벼락 위로 난 창호지 창문이 열려있고 밖에서 본 카페 안채의 사람들은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정겨웠다. 카페는 차 한잔 마시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차 한잔하면서 서울 사람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곳에 들릴 때마다 나는 자연스레 내가 왜 그렇게 서울을 편안하게 느끼는지 알 것 같았다.
22년 전 마음이 젊었을 때 내겐 내면의 상처가 고름처럼 내 속 안에 고여 있었다. 상처가 고름처럼 가득 차 있는 곳에서 행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대학 생활은 고통이었다. 얼마 안 되는 빚이 이자에 이자를 더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어서 아가씨 몸으로 아무리 벌어서 갚아도 줄어들지 않던 빚. 돈 때문에 나는 기를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살았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토큰 몇 개면 돌아볼 수 있었을 서울이라는 공간을 단 몇 퍼센트도 누리질 못했다. 완전히 서울의 이방인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그런 서울에 대한 매력을 누릴 수 없었다.
예쁘고 깜찍한, 마치 가정집처럼 꾸민 정겨운 카페에 들르면 그때 잃어버렸던 유년을 향기롭게 재포장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소곤소곤 남들에게 들릴까 웃으며 대화하는 정겨운 커플은 내가 본 적이 없는 엄마 아빠의 다정한 모습처럼 따뜻함. 안락함. 평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나는 그런 엄마, 아빠가 되는 게 인생 목표였음에도 그것만 빼고 다 잘 해냈다.
내가 아기 때부터 누렸어야 마땅했을 그런 분위기와 향기가 나는 가정집 분위기의 카페를 보면 걸음을 멈춘다. 주인 부부도 사이가 좋을까? 궁금증을 안고서 돌아본다. 카페 분위기가 아니라 사람을 본다. 친절할까? 손님에게만이 아니라 서로에게? 가짜로 포장한 친절인지 아닌지 살펴보기 위해 뜸을 들인다. 무슨 셜록 홈스도 아니면서 내 결핍을 커버하기 위해 상대에게서 단점을 찾는다.
그러면 그렇지 저들도 그렇지. 나만 그런 게 아니지. 그래서 박물관처럼 큰 카페보다는 가정집의 한쪽 거실을 빌린 것 같은 작은 카페가 좋다. 거기의 음식까지 맛이 있으면 감탄사가 나온다. 그리곤 며칠이나 그 한 접시의 장식을 회상하며 행복해한다. 유럽일까? 아프리카일까? 어디에서 구했을지 모를 고풍스러운 한 벽장 식이 우리 집 것이었더라면. 벼룩의 피똥이 범벅이 되어 있던 우리 집의 벽지 대신 그 카페의 벽지를 우리 집에 옮겨 놓는다. 그 앞에서 뽐내며 자랑하는 어리고 예쁜 나도 상상하면서.
나는 서울의 수도 없이 많은 카페에 들를 생각을 하면서 지금도 가슴이 뛴다. 그사이에 어떤 카페들이 생겼을까? 팬데믹 때문에 없어진 카페는 없을까? 맞다. 나는 서울을 떠나 객관적으로 내 내면의 상처를 바라볼 여유를 가졌기 때문에 서울에 가면 이제는 보이지 않던 소중한 기억들과 추억들을 찾아낸다. 그때는 너무도 아파서 쳐다보기도 싫었던 기억이 시간의 선물을 받아 추억이 되었다.
새로운 삶을 찾고 싶다면 그곳을 그 공간을 일단은 떠나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하면 어떨까.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고문과도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떠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디로든지 다녀오라고. 이왕이면 몇 년이건 새로운 시간 속에서 과거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디스턴스를 가질 수 있는 미지의 공간으로. 사람도 기억도 모두 잠시 미루고 어느 날 갑자기 "맞아 그렇지!" 하면서 펼치면 그때 끼워 두었던 단풍잎이나 네잎클로버가 툭하고 떨어져 모든 지나간 추억을 향기로 깨워줄 때까지.
나는 그리움을 축복으로 여긴다. 카페에 가면 사람이 있고 음식이 있고 대화가 있고 장식이 있다.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카페, 카페, 카페
한 번만 말하고 싶지 않다. 여러 번 되뇌고 싶다. 나는 카페의 사회적 역할을 사랑방 역할로 규정한다. 어릴 적 아랫목에 누워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안 하던 옆집 아저씨 같은 불청객 말고 화롯불옆에 둘러앉아 남편 흉을 맛깔나게 보던 동네 아줌마들 생각이 나서다.
나 역시 카페에 가면 영락없이 옆테이블의 사람이 듣건 말건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밴쿠버에선 옆테이블이 한국사람일 경우가 드물어 더 좋다. 하지만 요즘엔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도 많으니 조심은 해야겠지.
한국은 카페 천국이다. 병원 천국, 시장 천국, 음식 천국, 그러고 보니 한국이 천국이다.
밴쿠버를 999당에서 1당을 뺀 곳이라고 하더니 요즘엔 그말이 별로 들리지 않는다.
높아진 물가, 비싼 렌트비, 허덕이는 사람들이 늘고 부자가 더 부자가 되는 곳으로 변하고 있어서이다.
특별히 경복궁 근처에서 본 어느 카페 앞에서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담벼락 위로 난 창호지 창문이 열려있고 밖에서 본 카페 안채의 사람들은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정겨웠다. 카페는 차 한잔 마시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차 한잔 하면서 서울사람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곳에 들릴 때마다 나는 자연스레 내가 왜 그렇게 서울을 편안하게 느끼는지 알 것 같았다.
22년 전 마음이 젊었을 때 내겐 내면의 상처가 고름처럼 내 속 안에 고여 있었다. 상처가 고름처럼 가득 차 있는 곳에서 행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대학 생활은 고통이었다. 얼마 안 되는 빚이 이자에 이자를 더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어서 아가씨 몸으로 아무리 벌어서 갚아도 줄어들지 않던 빚. 돈 때문에 나는 기를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살았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토큰 몇 개면 돌아볼 수 있었을 서울이라는 공간을 단 몇 퍼센트도 누리질 못했다. 완전히 서울의 이방인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그런 서울에 대한 매력을 누릴 수 없었다.
예쁘고 깜찍한, 마치 가정집처럼 꾸민 정겨운 카페에 들르면 그때 잃어버렸던 유년을 향기롭게 재 포장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소근소근 남들에게 들릴까 웃으며 대화하는 정겨운 커플은 내가 본 적이 없는 엄마 아빠의 다정한 모습처럼 따뜻함. 안락함. 평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나는 그런 엄마, 아빠가 되는 게 인생 목표였음에도 그것만 뺴고 다 잘 해냈다.
내가 아기 때부터 누렸어야 마땅했을 그런 분위기와 향기가 나는 가정집 분위기의 카페를 보면 걸음을 멈춘다. 주인 부부도 사이가 좋을까? 궁금증을 안고서 돌아본다. 카페 분위기가 아니라 사람을 본다. 친절할까? 손님에게만이 아니라 서로에게? 가짜로 포장한 친절인지 아닌지 살펴보기 위해 뜸을 들인다. 무슨 셜록홈즈도 아니면서 내 결핍을 커버하기 위해 상대에게서 단점을 찾는다.
그러면 그렇지 저들도 그렇지. 나만 그런게 아니지. 그래서 박물관처럼 큰 카페보다는 가정집의 한쪽 거실을 빌린 것 같은 작은 카페가 좋다. 거기에 음식까지 맛이 있으면 감탄사가 나온다. 그리곤 며칠이나 그 한 접시의 데코레이션을 회상하며 행복해 한다. 유럽일까? 아프리카일까? 어디에서 구했을지 모를 앤틱 한 벽장식이 우리집 것이이었더라면. 벼룩의 피똥이 범벅이 되어 있던 우리집의 벽지 대신 그 카페의 벽지를 우리집에 옮겨 놓는다. 그앞에서 뽐내며 자랑하는 어리고 예쁜 나도 상상하면서.
나는 서울의 수도 없이 많은 카페에 들를 생각을 하면서 지금도 가슴이 뛴다. 그사이에 어떤 카페들이 생겼을까? 팬데믹 때문에 없어진 카페는 없을까? 맞다. 나는 서울을 떠나 객관적으로 내 내면의 상처를 바라볼 여유를 가졌기 때문에 서울에 가면 이제는 보이지 않던 소중한 기억들과 추억들을 찾아낸다. 그때는 너무도 아파서 쳐다보기도 싫었던 기억이 시간의 선물을 받아 추억이 되었다.
새로운 삶을 찾고 싶다면 그곳을 그 공간을 일단은 떠나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하면 어떨까.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고문과도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떠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디로든지 다녀오라고. 이왕이면 몇 년이건 새로운 시간 속에서 과거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디스턴스를 가질 수 있는 미지의 공간으로. 사람도 기억도 모두 잠시 미루고 어느 날 갑자기 "맞아 그렇지" 하면서 펼치면 그때 끼워 두었던 단풍잎이나 네 잎 클로버가 툭하고 떨어져 모든 지나간 추억을 향기로 깨워줄 때까지.
나는 그리움을 축복으로 여긴다. 카페에 가면 사람이 있고 음식이 있고 대화가 있고 장식이 있다.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사진 : khunkorn
사진 : khunk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