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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러 레이첼 Sep 24. 2023

남대문 새벽시장

"Girls be ambitious!"

새벽시장을 다녀오고 나면 삶의 지루함을 떨쳐 버릴 수 있다. 20대 초반에 친구 예림이를 따라 남대문 새벽시장에 몇 번 갔다. 네온사인이 밝힌 새벽시장은 딴 세상이었다. 끝없이 이어진 미로 앞에서 혼이 나가 버렸다. 


예림이는 작은 옷가게를 했다. 새벽시장에서 도매로 뗀 옷을 마네킹에 맵시 있게 입혀 놓았다. 터미널 지하는 나에게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대학교에 다니던 나는 예림이 덕에 그래도 패션을 체험했다. 수업을 마친 후 예림이 가게로 가서 이 옷 저 옷을 입으면 허리에 손을 올리고 까불며 모델 흉내를 냈다.


한국에서 엄마와 형제들을 빼고 나를 가장 많이 기다릴 여자는 예림이일 것이다. 예림이를 만나게 되면 또 누군가를 만나고 싶을 것이다. 그 사람 때문에 그렇게 예뻐지고 싶었다.  그래서 예림이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인가?


다들 얼마나 변해 있을까? 지금 이렇게 변해버린 내 모습을 보면 뒤로 물러서지는 않을까? "아냐, 절대 안 돼. 그때 그 모습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래" 고개를 젓는다.


사고 싶은 물건은 많고 돈은 없었다. 그저 아이쇼핑일 뿐인데 뭣 때문에 남대문 시장에서 그때 나는 그렇게 신이 을까? 오늘은 아니라도 내일은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이 있어서였다. 한국을 제집 드나들듯 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도 내년에는 가야지' 하는 것처럼.


다행히도 밴쿠버에서는 명품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다. 무엇을 하든, 먹든, 입든 남들 눈을 신경 쓰지 않는다. 때로는 이래도 되나 할 정도로 소탈해졌다.  마음이 매인 곳이 없어 자유롭다. 밴쿠버 살아 좋은 점이 많지만 남의 눈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게 가장 우선이다.


그때는 허당기가 있던 나조차 야망을 품었었다. 영어로 "Boys be!"라는 문구를 "Girls be ambitious!"로 고쳐 쓰면서까지 미래를 디자인했다.


그때 바라보았던 네온의 불빛은 라스베이거스였을 것이다. 가난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기에 '언젠가는'이라는 말로 미래꿈꾸며 달래고 싶었던 거다.  


한국은 그런 자녀들이 자라 일군 나라이다. 잘 살고 싶고 행복하고 싶고 대접받고 싶은 열망의 분화구속에서 어린 나도 성공을 갈망했다. 그새벽의 불빛아래 남대문 시장에서 바라본 성공을 아직 이루지는 못했지만 나도 한때 그런 꿈을 키웠다는 것은 잊을 수가 없다. 만약 서울이 한 권의 책이라면, 남대문 시장의 밤은 클라이맥스다. "이런 풍경은 아마 어디서도 없을 걸, 이 순간은 지금에만 존재해. 바라봐!"라며 머릿속에 남긴다.


중년이 넘어 다시 들른 남대문 시장거리. 그곳을 나와 명동을 거닐면 아직도 흥분된다. 바다의 밀물처럼 밀려다니는 인파, 점심시간이면 삼삼오오 목에 사원증을 걸고 다니는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남자들. 네온사인에 가려져 별은 보이지 않는 서울의 . 내나 라인게 맞나 싶을 정도로 이국적이다. 작은 나비 한 마리처럼 날아다니며 서울 사람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아 무슨 이야기든 듣고 싶다.  


남대문 시장에서의 추억도 빛이 바래간다. 나이 듦이란 버리는 것, 남기지 않은 것, 돌아가는 것, 나비처럼 가벼워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바램조차 말라간다. 그러길래 무겁지 않아 살만하다.


예림이만 건강하게 잘 있으면 좋겠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옷가게를 하던 겨우 한살 더 먹었던 예림이. 예림이는 그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그때의 예림이를 남대문 시장에서 만나고 싶다.


사진 : Starcev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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