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대답할 때 흔히 시작하는 문장이다. 내가 혹은 아이들이 무엇을 물었을 때 실상은 딱히 할 말이 없음에도 어떻게든 응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 표현은 요긴하게 쓰인다.
문두에 꺼내어 시간을 벌거나 마치 그 뒤에 깊은 고뇌를 바탕으로 이제부터 내가 응답하고자 한다는 기대감을 청자로 하여금 들게 하는. 여튼 이야기는 이쯤해두기로 하자. 남편의 잔머리 IQ와 결혼생활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쓰고자 하는 글은 아니니까.
그런데 말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나는 지난 주말 일을 생각하는데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할지 도무지 시작점을 찾을 수가 없다. 그녀가 짧은 시간 내게 남긴 족적에 해제를 달고 싶은데 그저 조금 특별한 하루였다라고 밑줄 긋고 덮기에는 무언가 여운이 남는다.
우리가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이다. 은서는 어느 날 한 달에 한번 가는 숲학교를 다녀오더니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년배를 만났다고 했다. 그런가 보다 하고 맞장구를 쳐주고 넘어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학교 같은 반 아이였다. 어쩜 신기한 인연이 있네 하며 생각했는데 얼마 뒤 은서는 그 친구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산다고 알려주었다. 거듭된 인연에 반가움이 생긴 나는 나중에 우리 집으로 한번 초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서는 같은 반 친구의 소식을 자주 들려주었고 동네 학원에 그 친구를 포함한 반 친구들 몇몇이 다니고 있으며 자신도 다니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은서를 데리고 학원에 가서 등록을 했고 같은 반 그 아이를 집으로 초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은서를 통해 아이 친구의 엄마와 연락이 되었고 인사를 나누며 같이 놀게 하기로 얘기가 되었다.
날짜를 논의하는데 주중이나 주말이나 다 괜찮다는 나의 말에 친구 엄마는 주중에는 이모님들이 힘들어하시니 내가 있는 주말에 보내겠다고 하였다. 나는 아이가 염려되어 그런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하며 주말로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는데 정부의 행정명령으로 5인 이상 사적 모임 금지 소식이 들려왔다. 친구의 엄마는 아이가 외동이라 인원수에 여유가 있으니 은서를 자기 집으로 보내도 된다고 하였지만 이래저래 날짜를 잡다 보니 연초가 되고 친구 초대는 해를 넘기게 되었다.
이윽고 새해가 되고 여러 날이 지났다.
(카톡대화)
“서희 어머니, 안녕하셔요? 주말 잘 쉬셨는지요?”
“안녕하세요~”
“다름 아니고 이번 주에 서희를 저희 집에 초대할 수 있을지 해서 연락드렸어요”
“주중에요? 주말에요?”
“네. 주중에도 괜찮아요. 화목금 오후에 서희 일정이 괜찮은 날이 있을까요?”
“화요일 3시 30분이 괜찮을 거 같긴 한데, 이모님이 서희까지 보시는 거면 토요일이 좋겠어요. 토요일이나 일요일 저희 집으로 보내주셔도 되고요~~”
“네, 저흰 주말도 괜찮아요. 그럼 토요일에 보내주셔요^^”
“네, 그럼 토요일 점심 먹고 2시에 갈게요~”
“네, 감사합니다. 은서가 넘 좋아할 것 같아요^^”
“서희도요~~”
약속 날 오후, 서희는 드디어 우리 집에 왔다. 양손 가득히 쇼핑백을 든 엄마와 함께.
아이들은 서로를 보자마자 신난다고 저희들끼리 떠들며 놀기 시작했다.
서희 엄마는 내게 대뜸 물었다. “몇 시에 데리러 올까요? 4시쯤요?”
우리 집에 온 시간이 2시가 넘었는데 4시에 데리러 오면 너무 짧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네네, 혹시 이후에 서희 일정이 있나요?” 내가 물었다.
“그건 아닌데 너무 힘드실 것 같아서요.”
“아 네네. 괜찮아요. 아이들 저희 집에 놀러 오면 오래 놀고 가요. 저녁도 먹고 가기도 해요. 있다가 상황 봐서 제가 전화 한번 드려도 될까요?”
서희 엄마는 익숙지 않은 표정으로 그러자고 하고 갔다. 나는 돌아서는 아이 친구 엄마를 보며 문을 닫았다.
서희와 은서는 거실과 안방에서 알콩달콩 노는 것 같더니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엄마, 놀이터 나가도 돼?”
“한 시간만 놀고 올게요. 저 핸드폰도 있어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밝은 대낮의 동네 놀이터라 그러려니 하고 내보냈다. 그리고 나는 서둘러 집안일을 했다.
둘은 놀다가 시간 맞춰 들어왔다. 집에 와서 한동안 놀다가 둘은 또 나에게 얘기했다.
“엄마, 놀이터에서 한번 더 놀고 와도 돼요?”
이제 5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이 되었다. 아직 집안일은 남아있고 같이 따라 나가자니 민서까지 챙겨야 해서 준비하다 보면 이삼십 분이 금방 지날 것이다.
“핸드폰 있어서 괜찮아요.”
아이 친구가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엄마아, 엄마아 놀다 올게요.”
옆에 있던 은서가 다시 보챘다.
마지못해 알겠다고 했다. ‘얼른 집 치우고 나가면 그렇게 늦지 않겠지.’
아이들은 웃으며 집을 나섰다.
다섯 시가 넘어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은서를 혼자서도 밖에 내보내긴 하는데 외동아이를 키우는 서희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자 조바심이 났다. 애들은 잘 놀고 있다면서 놀이터에 있다고 카톡을 보냈다.
그리고 나도 얼른 집안일을 마치고 민서를 데리고 놀이터로 나왔다. 왠지 내 메시지를 읽은 서희 엄마가 부리나케 나와 아이들을 챙기고 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은서와 서희는 놀이터에 없었다. 상가 슈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저 앞에 은서와 서희가 보였다. “은서야, 동생 데리고 왔다.” 애써 밝은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앞서 가던 세 사람이 한꺼번에 뒤를 돌아 우리를 보았다. 반가운 표정의 은서와 들뜬 친구 그리고 애써 마뜩잖은 표정을 감추는 친구의 엄마.
“애들 슈퍼에서 뭐 하나씩 사주려고요.” 서희 엄마가 말했다.
우리는 어색한 조합으로 슈퍼를 향해 걸어갔다. 그 기운에 눌리지 않으려 나는 괜히 어깨를 펴고 걸었다. 아이들은 신난다고 슈퍼로 뛰어 들어갔다. 하나씩 고르고는 아파트 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동생도 하나 고르렴. 언니들과 같이 사줄게.” 친구 엄마는 민서까지 해서 아이들에게 하나씩 원하는 것을 사주겠다 하였다. 나는 왠지 베이비시터가 된 기분이 들어 괜히 오뚜기 카레 하나를 고르고는 따로 계산을 했다.
밖에서 헤어질 생각에 서희가 들고 온 가방을 건네니 서희는 우리 집에 두고 온 물건이 있다고 했다. 또다시 어색하게 무리를 지어 다 함께 우리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애들 얘기를 하다가 잠시 또 말이 끊겼다. 친구 엄마가 말했다.
“요즘 서희는 한자를 배우고 있어요.”
“아 네네.”
서희가 내게 물었다.
“은서는 무슨 윤이에요?”
“어 은서는 파평 윤 씨야.”
“아..”
서희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엄마 내 이름은요?”
서희 엄마는 옅은 미소를 만면에 띠며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여유 있는 그리고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희의 '이'는 ‘오얏 리’야”
그 순간 아차 싶었다.
내가 보인 빈틈을 서희 엄마는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마치 손흥민이 두 겹 세 겹으로 에워싼 수비수들 사이에서 기가 막히게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 슈팅까지 연결하듯. 그리고 나는 두 눈만 껌뻑이며 꼼짝없이 골을 먹은 골키퍼처럼 속수무책 당했다.
집에 와서 나는 후다닥 윤의 한자를 찾아보았다.
‘다스릴 윤 尹’. 이 쉬운 걸 나는 왜 몰랐을까.
오늘 밤은 쉽게 잠이 안 올 것 같다. 이건 이불킥 각이다.
아, 분하다.
자기 전에 애들 이름을 한자로 한 번씩 써보았다. 누군가 다시 물으면 그건 기본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대답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