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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치노매드 May 13. 2022

왜 유치원에 가야 하는가

너에게 정체성을 묻는다

“왜 유치원에 가야 하는 거야?”

“내일은 오늘과 같을 거잖아.”


면면히 맞는 얘기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로 달래야 할까.

지난주에는, "그래 맞아. 네 말이 맞아. 엄마도 절절히 공감하고 있어. 맞는 얘기지." 하다 보니 유치원에 도착해있었다.

그 전주에는, 일단 좀 앉자며 근처 슈퍼에서 솜사탕을 사서 벤치에 한참을 있다가 유치원에 갔다.


오늘 아침엔 아이가 오늘은 정말이지 가고 싶지 않다며 도저히 못 참겠다는 뉘앙스로 이야기하는 바람에 차마 “가자.”란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소파에 벌렁 누워 만화책을 편 채로 자리를 잡는 아이를 보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유치원에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초록반 민서 엄맙니다.”

“네네.”

“다름 아니고 아이가 오늘은 집에 있고 싶어 해서요. 지난주까지 또 열심히 다녔다고 하루 정도 쉬고 싶은가 봐요.”

“네?”


구구절절이 결석의 사유를 설명하는데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선생님이 말했다.

“어머니, 괜찮으시겠어요?”
“아 네, 저는… 그렇죠. 괜찮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다며 전화를 끊고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래 그랬다는 양 민서는 아침의 부산함에서 해방되어 안온한 표정이었다.


아이에게 엄마가 일을 하는 동안에는 스스로 필요한 것을 챙기라고 설명한 뒤 컴퓨터를 켰다. 민서는 가끔 나에게 말을 걸긴 했지만 그런대로 시간이 무난히 흘러갔다.




사실 우리는 매일 아침 벌어지는 이 지루한 일과를 꽤 오랫동안 이어가고 있다.


재택이 가능한 날에 아이가 가기 싫다고 하거나, 몹시 꺼려하는 자가 진단을 해야 등원이 가능할 때면 아이는 결국 등원하지 않았다.

‘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아이의 말에 나도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가기에 몇 번은 잠자코 있었다. 내 입장에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야 할 이유는 일을 하고 집중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절박함은 내 사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 민서는 왜 유치원에 가야 하는가. 이것은 마치 ‘삶은 무엇인가’와 같은 본질에 대한 의문이다. 이런 큰 질문에 맞닥뜨린 나는 희한한 데자뷔를 느낀다.


자신의 존재 규정을 위협할 만한 특이한 사태가 발생하면, 새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 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정체성에 관련된 이러한 대화들은 신성한 주문이 되어 해묵은 잡귀와 같은 오지랖들을 내쫓고 당신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김영민. 추석이란 무엇인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어크로스. 2018


설마 민서가 책을 읽었을 리는 없는데... 사람은 몰리게 되면 궁극의 해결책을 찾게 되나 보다.

언제나 영혼만은 자유롭다 느꼈던 내가 추석에나 보는 친척의 물음을 던질 줄이야...


"민서야, 유치원 가야지?" 라는 질문에
아이는, "유치원이란 무엇인가?" 라 답한 격이었다.


한참의 고찰 끝에 마땅히 꺼낼 말이 없었다. 남편을 불렀다.

“여보, 여보.”

“엉, 왜?”

건넛방 서재에서  유튜브를 보고 있는 남편은 심드렁히 답했다.

“여보, 유치원 왜 가야 해요?”


남편은 아직 못 알아들은 듯 다시 물었다.

“어, 뭐라고요?”

“유치원에 왜 가야 하냐고요.”

“…”


상황을 파악한 남편이 잠시 침묵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민서야, 너 집에서 방귀 뀌어?”

“어”

“그럼 유치원에서는?”

“몰래 뀌어. 부끄럽잖아.”

“그래, 그런 걸 배우러 가는 거야.”

“아~아~”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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