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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치노매드 Oct 04. 2023

첫째와 둘째가 살벌하게 싸울 때 엄마가 하는 일

진실은 저 너머에

언니와 방에서 만화를 보던 둘째가 또르륵 거실로 뛰어나온다. 넷플릭스에서 각자 좋아하는 만화를 번갈아 가며 보기로 했는데. 자기 차례인데 언니가 보고 싶은 걸 튼다는 거다.


늘 있는 소소한 다툼이지만 그래도 속상해하는 둘째를 안아서 주방으로 갔다. 마침 마트에서 배달 온 식재료를 정리하다 블루베리가 눈에 띄었다.

“엄마 나 이거 먹을래.”

그릇에 한가득 담아 주니 ‘맛있네’ 하고 몇 번 맛을 보다 기분이 풀렸는지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첫째 몫도 따로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고 거실에서 쉬고 있는데 잠시 후 첫째도 또르르 나온다.

“엄마, 내 블루베리는?”

하며 고개를 돌리다가 ‘역시 내 것도 있지.’ 하는 표정으로 식탁에 놓인 그릇을 들고는 나에게 온다.

블루베리를 우물거리며 한마디 하는 소리가, "아니 쟤는 정말 자기 차례도 아닌데 저렇게 우겨."


뭐지? 둘 다 순한 눈망울로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 분명 하나뿐일 진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생각이 며칠 전으로 옮겨간다.



잠자기 전 우리는 침대 위에서 보드 게임을 하던 중이었다.

둘째는 자신이 이기자 중앙에 있는 카드를 가져갔는데 이를 본 첫째가 두 장 가져갔다며 나무랐다. 둘째는 한 장이라며 소리쳤다. 속사포 같은 언니의 언변에 둘째는 자신의 분노를 고스란히 담아 카드를 한껏 구기고 말았다. 이 둘의 논쟁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흥분된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두 사람 모두에게 각자 떨어져 있으라 했다.


“엄마는 지금 너희들과 같이 놀고 싶지 않아. 각자 자기 만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얘기해.”

시간이 지나자 내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이들이 뭘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첫째는 자기 방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첫째의 분위기를 살핀 뒤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있는 줄 알았던 둘째가 거실 한 귀퉁이 바닥에 앉아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몹시도 억울할 때, 누구도 자신의 맘을 알아주지 않을 때  둘째는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 치다 결국 집안 어두운 곳으로 찾아 들어가 가만히 울었다. 이럴 때 혼내면 역효과가 날 것 같았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조심스레 다가가 둘째 옆에 앉았다. 그리고 살그머니 말을 꺼냈다.

"아... 진짜. 억울하다. 분명 한 장이었다고. 솔직히 나도 봤어. 한 장 맞아. 민서가 맞아. 엄마가 그걸 못 봤겠니?"

아이가 가볍게 반응한다. 훌쩍이는 아이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언니는 진짜 좀 너무해. 일단 막 소리 지르잖아. 진짜 한 장이거든. 엄마는 민서 한 장 가져가는 거 봤거든."

아이는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근데 말이야, 민서야. 너 그거 알아? 엄마가 많이 당해봤는데. 네가 맞거든. 근데 네가 맞다고 막 소리 지르고 화내면 사람들은 네가 맞는지 안 맞는지 보다 민서가 소리 지르는 것만 봐. 그리고 너의 말은 안 들어줘. 그게 진짜 화나."


이렇게 말하는데 문득 내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울컥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내가 맞는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았던 억울한 기억들. 나는 분해서 소리쳤지만 조용히 하라는 말만 들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민서야, 있잖아. 앞으로도 이런 일은 많을 거거든. 그럴 때마다 화난다고 왈칵 성질 내면 네 말을 들어줄 사람이 점점 없어질 거야. 화나지만 그럴 때는 누그러뜨리고 말할 수 있어야 해. 물론 어렵지. 엄마도 지금도 안 돼. 하물며 어린 네가 되겠니.. 그냥 알고는 있으라고. 네가 아직 어려서 못하는 거 아니까 그냥 들어만 둬. 분하지. 억울하지 않냐? 근데 그게 인생이더라고. 그렇다고."


얼마나 이해하든 곧 초등학교 입학하는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둘째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나를 안았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따뜻한 수건으로 민서의 얼굴을 닦아주고 침대에 눕혔다.



첫째를 데리러 방에 갔다. 늦었으니 자자 하고 어깨를 쓰다듬는데 내 손을 탁 내친다.

이 아이도 달래야 하는구나.


어깨너머로 살펴보니 첫째는 좋아하는 캐릭터를 색칠하고 있었다. 말없이 옆에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혼잣말을 시작했다. "짜증 나. 왜 자꾸 우기는 거야. 아, 민서 진짜."

여전히 굳은 첫째의 얼굴.


"봤다고 내가. 솔직히. 그거 두 장이었잖아. 걔 왜 자꾸 우기니."

첫째가 입술을 삐죽이며 반응한다. 첫째의 입장에서는 자꾸 우기는 둘째가 괘씸했던 것이다. 첫째의 마음을 대변하듯 화가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첫째가 말을 꺼낸다.

"수지도 그랬어. 수지네 놀러 갔을 때 수지 동생이 나 때려서 수지가 동생을 때렸더니 엄마가 동생이 아니라 수지를 혼냈어."

"맙소사. 정말이야?"

"수지는 내 맘 알 거야."

"말이 안 되지. 동생이 너 때렸는데 왜 수지가 혼나?"

은서는 고개를 들어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어쩔 거야 민서. 네가 싫다 그러면 둘을 어떻게 키울까 고민이야. 네가 동생을 이렇게 못마땅해하는데... 주말에 아빠랑 얘기할까 봐 민서 잠깐 할머니댁에 보내자고."

은서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렇게 까지는 아닌데 그냥 화나."

"알아. 엄마도 민서랑 매일 같이 사는데 걔를 모르겠어?"

"...... "

"엄마 아빠 없이 둘만 있을 때도 그래?"

"아니 나랑 있을 때는 고분고분한데 엄마 있을 때는 저래."

"진짜? 엄마가 민서 편만 들어주는 것도 아닌데?"

"몰라 엄마 믿고 저러나 봐."

"아, 이건 얘기 좀 해야겠다." (물론 얘기할 생각 없음)


첫째의 표정이 처음보다 한층 누그러져 보인다.

"하여튼 결정은 네 몫이야.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근데 너 스티커 색칠 잘했네. 이 색은 찾기 힘든데 말이야. 엄마는 아주 맘에 들어."

첫째가 의자에서 일어선다. 그렇게 마무리 짓고 첫째를 침대에 뉘인다.


첫째는 동생 옆에 누우면서 나지막이 말한다.

"너 보내버릴 수도 있어."

"뭐얼?"


"얘들아 너무 늦었다."

말이 길어지기 전에 서둘러 불을 끈다.

"다들 고생했다. 잘 자라."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어휴.

이 묘한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하고자 복기해 본다. 두 사람 모두에게 진실인 그 상반된 진실은 대체 뭐가 진실인 걸까. 크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다. 진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오늘. 팩트를 좋아하는 나의 세상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이런 거구나. 육아는 아이가 아니라 나 자신을 기르는 거라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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