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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치노매드 Sep 30. 2022

일하듯 육아하시면 안 돼요

TJ 엄마들 뼈 맞는 소리

첫째 아이는 2년 전부터 동네 친구들과 철학 수업을 하고 있다. 철학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하겠지만 지금까지의 나의 관찰로는 '거짓말은 꼭 나쁜 걸까?' 와 같이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주제에 대해 생각을 나누고 경청하며 나의 논리를 만들어가는 연습으로 보인다. 함께하는 4명의 친구들을 이끄는 선생님은 19년 차로 그동안 수많은 아이들과 엄마를 경험한 베테랑이다.


철학 수업의 커리큘럼 상 한번 팀이 꾸려지면 오래 지속되기도 하거니와 선생님이 수업하면서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파악하여 각자에 맞게 호응을 하는 덕에 선생님과 아이들의 관계는 퍽 긴밀하다. 선생님은 어떤 주제든 되도록 본질에 대하여 아이들에게 묻곤 한다. 이를 테면 수업 시간 내내 돌아다니는 친구가 있다면, ‘움직이며 수업하면 어떨까?’ ‘꼭 자리에 앉아서 하는 것만 수업일까?’ ‘수업이 뭘까?’ 이런 식이다.

 

수업은 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방문하여 진행되는데 퇴근하고 집에 가서 땀을 뻘뻘 흘리며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어이쿠 하는 탄식이 종종 나온다. 수업 중 각기 다른 아이들의 폭발적인 에너지에 반응하는 선생님을 떠올리며 경외의 마음을 갖고 철학 수업을 지지하게 된다.


선생님은 일 년에 두 번, 매 학기가 시작될 때 엄마들과 상담을 한다. 평소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철학 수업에 임하는지 잘 모르고 궁금하기에 수업 상황을 공유하거나 혹은 아이를 기르면서 마주하는 고민을 나누기도 한다.


9월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상담 일정을 잡으려는데 문득 그간 선생님과 마주하고 얘기를 길게 나눈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코로나로 혹은 바빠서 자꾸 미루다 보니 그리된 것이겠지. 이번에는 가능하면 점심 식사하시면서 얘기하자고 연락을 했다.


며칠 뒤, 선생님과 집 근처 음식점에서 만났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선생님과 가끔 마주칠 때 안부를 묻는 정도였는데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앉으니 새롭고 반가웠다. 얼마 전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로 인사를 대신했다.


“지난번에는 바빴네요. 다들 갑자기 연락을 받아서요.”




철학 수업이 있는 날, 평소와 같이 일하는 중이었다. 휴대폰 진동이 울리며 ‘이모님’이라는 메시지가 뜬다. 이모님이 전화를 하는 경우는 나에게 무언가 의견을 물을 때였고 대부분은 ‘저녁식사 뭘로 할까요?’였다. 식사 메뉴를 묻기에는 시간이 너무 이른데 하고 스치듯 생각하며 응답 버튼을 눌렀다.

“네, 이모님”

“은서 엄마, 제가 지금 병원에 와 있는데요.”

“네?”


아무래도 으슬으슬한 기분이 들어 혹시나 싶어 PCR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왔다는 것이다. 곧 철학 수업이 시작되는데 우리 집으로 오는 선생님과 아이들을 만나야 하니 확실히 판정을 받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양성’이었다. 다행히 특별히 아픈 곳은 없다고 하셨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철학 수업까지 30분 남았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려 하는데 일단 상황을 수습하는 게 제일 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모님에게는 바로 퇴근하시라 말씀드린 뒤 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니 되도록 빨리 짐을 챙겨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곧이어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오늘 수업을 미루거나 만약 가능하다면 비대면으로도 할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철학팀 엄마들이 모여 있는 단톡방에 상황을 전하고 대안에 대하여 얘기했다. 다행히 엄마들은 빠르게 회신을 주었다. 덕분에 수습은 빨리되었고 아이들은 갑자기 수업이 취소되었다며 아쉬워했지만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냈다.


급박했던 30여분이 지나고 차츰 안정을 찾고 나니 문득 엄마들이 고마웠다. 사실 엄마들 입장에서 보면 수업 시작 바로 전에 전화해서 갑자기 오늘 수업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그다지 반가웠을 리 없다. 더군다나 다들 일하는 터라 집에 별도로 연락해서 아이들이 헛걸음하지 않도록 이야기를 전해야 했으니 수고로울 법하다. 그래도 엄마들은 별다른 동요 없이 사무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상황이 정리된 후 다들 고생하셨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단톡방은 다시 잠잠해졌다. 업무로 돌아갔겠지.


나는 엄마들의 이런 점이 편하고 좋았다.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엄마들. 필요한 일 처리에 집중하고 구태여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엄마들 성향이 다들 비슷해요. 바쁜 거 정리되고 바로 본업으로 돌아가더라고요.”

업무 보듯 군더더기 없는 처리에 웃음 짓는데 선생님이 정색하며 말했다.


"일하는 것처럼 육아하면 안 돼요."


네?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아이가 그런 태도 때문에 마음을 열지 못할 수 있어요.”

하며 얼마 전 상담했다는 훌륭한 스펙의 전문직 엄마 얘기를 꺼냈다.


“언니!” 하며 울면서 늦은 시간 자신에게 전화했다는 전문직 엄마는 똑똑한 첫째를 기르며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고민을 둘째를 기르면서 시작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물었다.

 "한 번이라도 거실에 그저 널브러져 본 적 있어? 그렇게 매사 완벽하고 빈틈이 없으면 오히려 아이가 답답함을 느낄 수 있거든.”


선생님은 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지고 있었다. 감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쳐서도 안 되지만 아무런 감정 없이 대해도 안 되는 거다. 내 말에 가끔 한숨을 내쉬던 아이의 모습이 불편하게 떠오른다. 나름대로는 아이에게 스트레스 주지 않고 키우고 있다고 여겼는데... 선생님의 표정은 그건 나의 착각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현타가 세게 왔다.


“제가 몰랐네요.”

내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한마디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오늘 집에 가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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