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웠다. 선뜻 전화하기가.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그냥 아픈 사람도 아니고 병원에서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이에게. 소식을 듣고도 며칠을 그냥 보냈다. 아니 몇 주나 흘렀을 거다. 작은 가시가 박힌 마냥 얼마간 잊고 지내다가도 다시 생각이 났다. 어느새 12월이 되고 연말 분위기가 되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이 점점 커져만 갔다. 해를 넘기지 말고 안부를 전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몰랐다. 그가 아프다는 걸. 언제나 그랬듯 꿰뚫는 듯한 눈동자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곤 했던 사람이라 그가 회사 전체에 보냈다는 글을 전해 읽는데 마치 옆에서 그의 말이 들리는 것 같다. 글을 몇 번이고 읽었다.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썼을까.
내가 아는 그는 병원의 딱딱한 침대에 앉아 회사 랩탑을 꺼내고는 집중해서 쉬지 않고 써내려 갔을 것이다. 그리고는 회사의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메일을 보냈으니 확인해 달라고 전화나 카톡을 보내지 않았을까. 자신의 소식도 회사일처럼 똑 부러지게 처리했을 것이다. 랩탑을 덮고는 에고에고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눈을 감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겠지. 몇 번이고 삶의 순간을 되돌아보지 않았을까. 그때인가. 그때였을까. 그랬다면 지금과 달라졌을까.
전화를 걸기가 주저되었다. 연초에도 새해 인사를 주고받았는데. 새해 복 많이 받아. 아이가 아직 돌 전이라 손이 많이 가겠다. 올해도 잘 살아내자. 응 그래. 너도 잘 지내. 그리고 지금에 와서 어떤 말로 연결해야 할까 싶었다. 함께 20대 후반을 보내고 나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 이래로 우린 먼 거리만큼이나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리며 살고 있었다.
종종 소식을 주고받고 내가 부산에 내려갈 때마다 한 번씩 얼굴을 보긴 했지만 그 시절 친밀함보다는 지독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옛 동료를 만나 회포를 풀고는 하는 정도였다. 한 번은 그때는 철없이 굴었다며 문득 연락 온 적이 있었다. 내가 예전에 너한테 그런 소릴 했더라고. 미쳤나봐. 그런데 정작 나는 그런 일이 있었나 기억도 안 났다. 그래서 아 그랬냐 하고 웃어넘겼다. 그런 식이었다. 우리의 안부인사는.
돌아보면 내 삶이 불안했을 때 어쩐지 그는 내 곁에 있었다. 남편을 만나기 전 불같은 연애를 한 적이 있다. 그도 연인이 있었을 때라 우리는 더블데이트를 하기도 했었다. 나는 그에게 종종 연애 얘기를 털어놓곤 했다. 한 번은 당시 남자 친구와 크게 틀어진 적이 있었다. 엄마는 이런 속사정은 모른 채 자취하는 남자 친구를 챙겨주라며 정성스레 간장게장을 만들어 내 손에 들러 보냈다. 도저히 전해줄 수 없는 간장게장을 손에 들고 나는 그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가 간장게장을 담았는데 너 먹을래?”
이유는 없었다. 거짓말은 하기 싫었고 상황을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알았다.
“남자 친구랑 싸웠냐?”
나는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않고 다시 물었다.
“먹을래 말래. 되게 맛있을 거야.”
그는 대답했다.
“그래 고마워 잘 먹을게. 나 없으니까 우리 집 냉장고에 넣고 가.”
“어 그럴게.”
그는 그릇을 돌려주며 정말 맛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귓등으로 넘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그릇을 전하며 그가 담아준 말을 고스란히 반복했다. “잘 먹었대.”
부산 학회에 갈 일이 있었다. 당시는 둘째를 낳고 복직했을 무렵이라 무척이나 고단한 삶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연락하자 그가 아무렇지 않게 점심 장소를 잡아 알려주었다. 위치가 어딘지 대충 확인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그런데 택시기사님이 갸웃갸웃하면서 길을 헤매는 듯했다. 무슨 일인가 보았더니 식당이 내가 내린 부산역 코앞에 있었다. 오기 편하게 일부러 부산역 근처에 식당을 잡아준 거였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의. 그 성의를 몰라보고 헤매다 식당에 도착했다.
그렇게 오래간만에 우리는 만났다. 그때 나는 이직을 했었고 그는 부산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아가던 차였다. 우리는 서로가 쏟아내는 삶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고 될 수 있는 대로 서로를 이해하려 추임새를 넣었다. 커피 한잔을 하려 자리를 옮기는 길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빨리 마흔이 왔으면 좋겠어.” 그는 그저 안쓰러운 듯 몇 마디를 덧붙였던 것 같다.
부산에 내려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그는 성당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리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내게 전화를 하더니 세례를 받는다며 대모를 서달라고 했다. 첫째를 기르고 있던 터라 나 혼자라 해도 부산까지 당일로 다녀오기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모 서는 일을 핑계로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 움직이는 것은 더욱 그랬다.
결국 축하한다는 말만 전했다. 그의 결혼식에도 마찬가지였다. 너도 아이를 낳고 기르면 날 이해할 거야 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내가 미안했던 기억은 빨리 잊었다. 경주마처럼 그저 마흔 살을 향해 달려가느라. 별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는 섭섭했겠지. 그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나는 언제나 내 삶을 부단히 쫓아가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처럼. 나와의 관계 속에서 그는 많이 외로웠을까.
언제부터 친하게 지냈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만나면 짧지만 냉정하지 않은, 한마디지만 응축된 말을 주고받았다. 말을 돌려서 하면 풀어서 알아들었다. 개중에 안 풀리는 말은 풀어내라 나에게 직접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좋았다. 나를 포장하지 않아도 되고 길게 해명하지 않아도 되고. 힘들이고 공들여서 나를 표현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던 그가 편했다.
그런 그에게 전화를 걸어 대화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잘 지내니. 소식은 들었어. 너무 냉정해 보인다. 나야, 오랜만이지. 이렇게 시작하면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울 것 같다. 연락하자 결심을 내리고도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다가 카톡창을 켜고 전하고 싶은 말을 와르르 쏟아냈다.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한편으론 허무하게도 그는 카톡을 열어본 순간 전화를 했다. 나는 당황해서 엉겁결에 전화를 받았다.
“어어. 나야.”
전화기 너머의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여어. 잘 지내시나.”
“나야 뭐. 애들 둘 키우고 회사일 주섬주섬하고 있지. 넌 어디니. 지금은 병원인 거야?”
“응 1차 항암 마치고 2차 항암 치료하려고 왔어. 한번 하고 나니까 두 번째 하는 게 왜 이렇게 무섭고 떨리는지 모르겠다.”
나는 둘째 출산하러 갔을 때가 생각났지만 지금 그 얘길 하는 건 위로도 아니고 공감도 아니다 싶어 그저 듣고 있었다.
“응 그래 그렇지.”
사는 얘기, 애들 소식, 흘러간 그 시절 얘기를 하는데 수화기 너머 그에게 어느 순간 적막이 흐른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가 병원 침대에 앉아 전화를 받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발은 안 차니.”
“나 지금 주무르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냐.”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