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회의실로 안내받은 나는 조금 기다렸다가 팀장을 만났다. 팀장은 자신의 자리로 데리고 가서 부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더니 저쪽에 가서 대기하라고 했다.
내 자리는 어디인 거지 싶었지만 차차 알려주시려다 보다 여기고 팀장이 가리키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앉아 있었다. 신입사원인 나를 알아보고 같은 부서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선배도 만날 수 있었다.
뭐지? 자리를 잡지 못하고 꿰다 놓은 보릿자루 같이 서 있었다. 선배가 말했다.
"레이치, 그냥 편한 곳에 앉아요."
여기는 모바일 오피스, 즉 자유석이라고 했다. 정해진 자리 없이 아무 곳이나 앉아서 쓰면 되는 곳.
왜... 자리가 없는 거지?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자기 책상이 있는 거 아닌가?
나는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 꽤나 놀랐다. 나중에야 영업직은 대부분 거래처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 사무실에 별도의 지정석이 없다는 설명을 듣게 되었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처음 한두 달은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제품 교육 후 거래처를 담당하게 되면서 자리가 필요 없다는 말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영업을 하다 보니 회사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전화를 하고 노트북을 열어 자료를 찾아보는 장소는 주로 자동차 안이었다. 차분히 앉아 있을 곳이 필요할 땐 1시간 이상 운전해서 들어가야 하는 회사가 아니라 가까운 스타벅스가 훨씬 유용했다. 오전에 사무실에 들렀을 때 외국인 부서장은 나를 보더니 영업사원이 아침 시간에 사무실에 무슨 볼 일이 있냐며 얼른 거래처로 나가라고 한 적도 있었다.
맞는 말이었다. 회사 인근의 병원을 담당하지 않는 이상 웬만한 경우에는 자동차나 인근 카페가 업무를 빨리 보기에 수월했다. 나 역시 처음에는 모르고 익숙지 않아 브로셔를 챙겨가기 위해 자주 사무실에 들렀다. 영업을 시작한 지 2~3년이 지나자 사무실은 팀 회의가 있거나 교육 혹은 워크숍이 있을 때 위주로 들어가게 되었다.
#2 ‘영업’하는 게 부끄럽나요?
보험이나 펀드에 가입할 때나 비행기에서 입국서류를 작성할 때 묻는 직업란에 어떻게 쓰면 좋을지 고민을 하던 때가 있었다. 일반 사무직은 아니고 그렇다고 영업직이라고 쓰기에는 ‘가판대'가 생각났다. 학회 참석 차 같이 출국하는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님, 입국카드 쓸 때 직업란 뭐라고 하세요?" "어, 나는 그냥 employee라고 쓰는데? 지난번에 보니 다른 차장님은 business 이렇게 쓰더라."
영업을 하고 있으면서 '영업사원' 이렇게 적기가 망설여졌다.
병원에서 만나는 선생님들 중에는 나를 가리켜 '마케팅하는 사람'이라고 돌려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일터 밖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저 영업합니다.’라고 소개하면 '힘든 일 하시네요.' 하는 사람도 있었고 계산적이고 약삭빠르겠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학교 동아리 선배나 다른 회사에서 인턴을 같이했던 친구들을 만나면 '니가 왜 그걸?' 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굳게 다문 사람들도 있었다.
회사에서는 의료기기 영업사원을 'Product Specialist'라고 불렀는데 줄여서 PS라고 했다. 말 그대로 제품을 잘 알고 제품이 쓰이는 수술에 대한 넓은 지식을 가진 사람을 생각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신선한 표현이네 하며 명함에 적힌 내 직급을 몇 번이나 손가락으로 쓸어 봤다.
이제야 고백하던데 당시 나는 지원한 직군이 영업직인지 몰랐다. 채용공고에는 영업직, sales라는 표현 대신 Product Specialist라고 쓰여 있었고 업무 내용에는 온갖 설레는 말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이없는 소리 같지만 입사하고 나서 그런 설레는 일을 하는 게 ‘영업사원’이라는 걸 알았다. 1화 참조: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의료기기
#3 저 영업하는 사람이에요
한 번은 인사팀 상무님과 면담을 한 적이 있었다. 상무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레이치처럼 젊은 나이에 영업하는 건 앞으로의 어떤 커리어를 가든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정말로 그랬다. 영업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겠지만 나는 '누구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면 실적은 따라올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주된 고객인 의사 선생님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고민했다. 회사에서는 이를 가리켜 고객의 미충족 수요(customer’s unmet needs)라고 불렀는데 병원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선생님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어떤 점을 아쉬워하는지 열심히 찾았다.
내가 속한 부서는 시술(내과적 수술)에 사용하는 제품을 판매했다. 대부분 외과보다는 내과나 영상의학과 선생님들이 대상이었다. 같은 치료를 절제 범위가 크고 전신마취를 하는 수술이 아니라 국소 마취를 하는 최소 침습 시술로 할 수 있다는 장점 덕에 외과 선생님들은 새로운 술기를 배우려는 수요가 있었다.
당시 내가 담당하는 외과 선생님 중 한 분은 병원을 새로 옮기면서 수술이 아닌 시술로 환자를 치료하고자 했다. 때문에 함께 일하는 간호사 선생님 등 수술팀에게 시술을 하는 방법을 교육할 필요가 있었다. 회사에 마련된 트레이닝룸으로 수술팀을 초청했다. 새로운 술기를 배우고 회사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도 마시며 모처럼 병원 밖에서 기분을 전환한 선생님들은 병원으로 돌아가 새롭게 배운 시술법으로 수술방에서 환자를 치료했다. 시술에 필요한 제품을 모두 우리 회사 제품으로 배우고 익혔던 덕에 자연스레 병원에서는 우리 제품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고객이 아쉬웠던 부분을 해결하면서 세일즈 실적은 자연히 따라왔다. 내가 취한 활동에 대한 결과가 나오자 일이 즐거웠다. 일하는 재미에 점점 빠지게 되었다.
금요일 저녁까지 이어진 긴 수술 참관을 마치고 불이 꺼진 회사에 들어왔다. 다들 퇴근한 시간에 텅 빈자리에 앉아 시술 참관 리포트를 쓰고 사용한 제품을 정리하는 그 기분이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채용공고에서 보았던 대로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여 필요한 솔루션을 제공한다’는 이 일이 그렇게 신나고 재미있을 수 없었다. 이런 게 사회생활이구나. 이런 게 일하는 거구나. 조용한 사무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마시던 커피. 맥심의 맛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