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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Feb 20. 2019

#5 M

사라진 소리들이 가는 세상

'눈 밟는 소리 녹음'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한 줄의 글과 사진. M을 다시 만난 건 이 포스팅 때문이었다.      


눈 쌓인 밤길을 걷는 발과 작은 마이크로폰. 흰 눈과 이에 대비되는 검은 운동화. 사진이었지만 눈 밟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떤 필터도 쓰지 않은 단정한 사진 한 장은 A의 눈길을 사로잡더니 마음에 파장을 일으켰다.      


주변 소리를 모두 흡수하며 내리는 눈. 먼 곳의 소리도 들릴 것 같은 고요한 밤.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싶은 청년의 뭉뚝한 발. 눈, 밤, 발. 눈, 밤, 발. 짧은 이 단어들은 마치 감탄사처럼 A에게 주문을 걸어 그의 세포를 하나씩 일깨우고 있었다. A는 오래전 보았던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마당에서 눈을 밟으며 짓던 소박한 웃음이 떠올랐다.      


"여보세요? 잘 지냈어요?"     


A와 M이 처음 만난 건 몇 해 전 미디어센터에서였다. A가 일하는 도시에 시청자미디어센터가 새로 개관하며 수업을 맡을 강사를 찾다 제안이 그에게까지 온 것이다. 신세를 졌던 본부장의 부탁이었기에 A는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말주변이 없는 A는 남들 앞에서 무언가 가르친다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수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곤혹스러웠다.     


그러다 누군가 각본을 쓰고 누군가 더빙을 하고 누군가 내레이션을 맡고 또 누군가는 연출을 맡아 라디오 드라마를 완성하는 것으로 수업 방향이 정해졌다. 처음 해보는 일들이라 모두 들뜬 기운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또 어려움이 따라 수업은 제자리에서 맴돌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음향을 맡기로 한 이가 어디서 구했는지 라디오 방송사에도 없는 효과음들을 가져왔다. 심지어 오디오 편집장비인 프로툴(Protools)까지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M이었다.      


“선생님은 뭐 하시는 분인데 여기서….”

“포스트 사운드 일을 좀 해요. 팟캐스트를 하고 싶어서 수업을 들어봤어요.”     

그의 목소리는 높고 상냥했다.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처럼 들뜬 목소리. 무슨 말을 해도 항상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이 M은 빠르고 영민하게 답을 두 번씩 반복했다.      

“사운드 관련 일을 하세요?”

“네네.”     


A는 상냥한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자기 목소리는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내뱉는 말투였다. 말도 별로 없는 편인데 한 번씩 말하는 게 그 모양이어서 뜻하지 않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요즘 뭐 하세요? 의논할 게 있는데 한번 만날까요?”     


2년 만에 다시 M을 만났다. 눈 밟는 소리를 녹음하던 사진 속 운동화를 신고 M은 A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만나고 보니 그들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었다. 이것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새 두 배로 불어난 그의 몸은 더 놀라웠다.      


“그동안 곰돌이가 되셨네요.”

“아, 네.”

“나의 유지태가 되어 주세요.”

“네?”

“나는 이영애이고 당신은 유지태입니다.”

“네에?”

“섬에서 소리를 녹음해 방송하고 싶습니다. 소리로만 여행을 하는 겁니다. 라면은 잘 끓여요.”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나누는데 눈이 쏟아졌다. 차갑지만 따뜻하게 모든 걸 덮어주는 함박눈이었다. 눈 때문이었는지 M과 A는 마음속에 있던 이야기를 쉽게 꺼내 놓았다. 학창 시절 M은 밴드에서 기타를 쳤다. 음악 지망생이었고 언어학을 전공했다. 사운드 엔지니어 일을 하기까지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고 이야기를 흘렸다. 얌전한 사람이지만 어딘가 끝을 보고 싶은 오기가 있음이 느껴졌다. A는 그의 인생을 바꾼 영화 <일 포스티노>와 <봄날은 간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작은 파도’, ‘큰 파도’, ‘신부님이 치는 교회의 종소리’, ‘내 아버지의 슬픈 그물 소리’, ‘밤하늘 별들의 소리’ 섬의 아름다운 소리를 녹음해 시인 네루다에게 들려주려는 우편배달부의 이야기. 소리로 담을 수 없는 것까지 담아내고 싶었던 그가 사실은 시인이라고. 그런 소리까지 담을 수 있겠냐고 A는 술에 취해 이야기했다.      

M은 고개를 끄덕였다. 술 취한 삼류 시인 같은 이야기보다 소리를 찾아 함께 가자는 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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