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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May 24. 2021

#4 엘리베이터

사라진 소리들이 가는 세상

나이를 먹는 것은 침묵에 익숙해져 가는 일이다. 소리쳐 외치는 것보다 입을 다무는 것이 편하다는 걸 세상으로부터 배운다. 삶은 나날이 단순해지고 간결해진다. 만날 친구도 줄고 만나야 할 말도 별로 없다. 스스로 세운 삶의 규칙에 다른 소리가 끼어들 틈은 없다.      


시끄러운 것은 덩그러니 TV 뿐이다. 덧없이 가벼운 시계 초침 소리가 삶의 무게로 느껴지는 고독한 인생. 생의 끝은 결국 세상의 저편, 무음의 세계로 들어서는 일이다. 궁극의 무음. 우리는 떠들썩하게 태어나 침묵으로 생을 마감한다.      


일기를 쓰다 말고 A는 노트북을 덮는다. 쿵쿵거리는 발소리 때문이다. 그리고 화장실 물내려가는 소리와 이어지는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이 도시는 고독마저 소음으로 방해하는군. A는 자신도 누군가에겐 층간소음의 장본인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쓴 웃음을 짓는다.      


집안에서는 소음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지만 막상 현관문을 나서면 아파트는 고요했다. 사람들이 모두 소음을 범죄로 여겼기 때문인지 아파트는 한결 조용해졌다. 코로나가 퍼진 후 그 적막함은 더 깊어졌는데, 누군가 헛기침이라도 하는 소리가 들리면 잠깐 열었던 창문까지 모두 걸어 잠그는 통에 소리는 아파트 복도를 이리저리 배회하다 마치 유령처럼 슬며시 사라지곤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혹은 자신이 보호받기 위해 다들 최선의 노력으로 살고 있구나 A는 생각했다.          


A는 엘리베이터 타는 걸 끔찍이 싫어한다. 밀폐된 공간에 대한 공포는 이곳을 진공으로 착각하는 망상으로 이어져 실제 몇 차례나 숨이 턱 막히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과 같이 탈 때는 그 침묵의 무게가 더해져 A는 자신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계단으로 다니려 하지만 오늘은 M과의 약속에 늦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말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안에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혹시 이들 중 누군가 어젯밤 층간소음의 장본인이 아닐까. 발로 내리찍듯 쿵쿵 걷는 것도 모자라 한밤중에 세탁기를 돌린 무뢰한이 여기 있을 수도 있다. A는 마치 탐정이라도 된 듯 사람들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중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남자의 발가락에 시선이 닿았다. 슬리퍼 앞으로 튀어나온 사내의 두툼한 발가락을 바라보며 어젯밤 쿵쿵거리던 묵직한 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A는 시선을 올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려다 비닐봉지에 눈이 멈추었다. 남자가 들고 있는 비닐 안에는 큼직한 생선이 진공 포장되어 있었는데 방금 바다에서 포획되기라도 한 것처럼 놀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진공에서 해제되면 마치 다시 헤엄이라도 치겠다는 듯한 눈길로.          


7층에서 지상으로 내려가는 짧은 시간 동안 A는 우주의 낯선 공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아무 소리가 없는 곳. 우주나 혹은 심해에 간다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엘리베이터에 누군가 같이 있을 땐 그런 기분이 더했는데 그 안이 너무나 조용하여 마스크에서 들리는 자신의 숨소리가 영화에서 보았던 우주인의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A는 영화에서 본 우주를 상상했다. 그에게 우주란 아무 소리가 없는 곳. 완벽한 고요의 공간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에 A는 정신을 차렸다. 진공 포장 속 생선은 계속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A는 그 눈을 피해 자동차로 달려갔다. M은 이미 주차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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