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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Mar 22. 2019

#2 A

사라진 소리들이 가는 세상

높은 안테나가 있는 옥상에 올라가면 멀리 바다가 보이는 곳. A가 일하는 곳은 항구도시의 라디오 방송국이다. 한적하다면 한적하고 따분하다면 따분한 곳. 매일 사람들의 엇비슷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음악을 틀어주는 일. 너무나 좋아했던 그 일이 이제는 적당히 안락하고 적당히 지루한 일이 되어버렸다. ‘요즘 라디오를 누가 듣나.’ 언젠가부터 들리던 이 소리가 그의 귀에서 맴돌았다.     


어느 순간 A는 이런 일에 자신이 지쳤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하려다 찾은 것이 소리 녹음이었다. 말이나 음악이나 라디오는 결국 소리를 전달하는 매체라는 생각에서였다. ASMR 콘텐츠처럼 우리 주위의 소리를 그 의미와 함께 들려주는 것.       


“그거 너무 뒷북 아니야?”          


회사 선배 중에는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를 왜 21세기에 따라 하냐며 비아냥대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유일한 장점이라곤 뚝심밖엔 없는 A에게 그런 말이 먹힐 리 없었다. 그런 비난보다는 무료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그에겐 더 견디기 힘들었다. A는 무작정 밖으로 나가 소리를 녹음하기로 했다. 얼마 전 기차 소리를 녹음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전 9시. 

고가도로 아래 건널목. 호루라기 소리에 도로를 달리던 차들이 멈춰 선다.      


“댕강댕강. 댕강댕강”      


차단기 종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더니 역에서 근무하는 나이 지긋한 인부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도로를 통제한다. 매일 아침 인천항으로 석탄을 싣기 위해 화물열차가 이곳을 지나는 것이다. 항으로 수입된 유연탄과 제철 등이 이 축항선 선로를 통해 제천과 단양 등으로 수송된다.     


교통 신호가 없어 복잡하던 고가도로 밑이 순간 조용해진다. 온갖 소음들로 시끄럽던 도심이 멈추는 마법의 시간. 간혹 이 길을 지나다 만나게 되는 이 순간이 A는 매번 신비롭다.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영화 <이상한 나라의 폴>의 4차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A는 녹음기를 꺼냈다.    


모든 사물이 멈추었는데 혼자 정지화면을 찢고 나오는 듯한 화물열차.      


‘철컹철컹. 철컹철컹.’      


열차 머리칸이 선로를 따라 홀로 지난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그 모습이 초라하다.        

 

“아침에는 머리칸만 오니까 소리가 크지 않을 텐데. 이따 오후에는 석탄을 싣고 가니까 소리가 더 크게 나. 그때 녹음을 하지 그래?”     


건널목을 지키는 인부가 헤드폰을 쓴 A에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저기 있잖아. 횡단보도 가운데. 거기 철로 나사가 헐거운 데가 있는데, 거기 가면 소리가 크게 들려.”     

어린 시절 A가 살던 동네에도 열차가 다녔다. 항구와 공장을 오가던 화물열차. 그 선로 일대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아이들은 기차가 언제 오나 선로에 귀를 대고 알아맞히는 내기를 했다. 또 멀리 기차가 오는 게 보이면 선로 위에 못이나 돌멩이를 올려놓고 그것이 일그러지는 걸 쳐다보곤 했다. 기차에서 아저씨들은 고함을 지르고 아이들은 도망갔다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같은 짓을 반복했다. A는 기차를 보며 그걸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오후 3시. 

마이크와 녹음기를 든 A는 건널목에 다시 서 있다. 어느 순간 꽁무니에 줄줄이 화물을 실은 열차가 정지화면을 뚫고 나타난다.     


“처얼컹 처얼컹.”     


노쇠한 디젤 열차는 마치 지팡이라도 짚고 걷는 양 느리게 지난다. 아저씨가 말한 대로 나사가 헐거운 곳에서 소리가 크게 난다. 건널목을 건너던 사람들이 붙들린 듯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본다. A는 손으로 기적을 잡아당기는 흉내를 낸다. 기관사에게 기적을 울려달라는 신호다. 어린 시절에도 지나던 기차에 이렇게 수신호를 보내곤 했다.      


“빠앙”     


우렁찬 기적이 울린다. 그 소리가 멋지게 녹음되었다. A는 기관실을 바라보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기차가 지나고 사람들이 길을 건넌다. 기차는 경인선 전철 선로로 진입해 멀어진다. A는 집에 돌아가지 못한 소년처럼 건널목에 홀로 남았다. 다시 차들의 소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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