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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Jun 20. 2021

#1 타령의 달인

사라진 소리들이 가는 세상

“그러니까 테이푸를 우리한테 만들어 줄 수 있어? 회원이 60명 조금 넘는데. 그거 복사하면 다 만들어 줄 수 있지?”

“아. 선생님 저희는 라디오라서 소리 녹음만 해요. 영상은 찍지 않아요. 지난번에 말씀….”

“아, 라디오? 라디오야? 라디오를 요즘 누가 들어?”

“…….”     


라디오 누가 듣냐는 말은 그동안 많이 들어왔지만 팔십이 넘은 시골 노인에게 이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라디오에 대한 추억이 있는 어르신마저 이렇게 이야기하니 A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아니 어르신! 요즘 농악을 누가 들어요. 라디오에서나 나오는 거죠.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안다고…. 그리고 요즘 누가 테이프를….’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이 말을 삼키느라 A는 전화기에 헛기침을 해댔다.     


“콜록콜록. 녹음 잘해서 들려드릴게요. 우리 소리를 소개하는데 선생님 소리가 빠지면 되나요. 저 지난번에 안산 축제 때 인사드렸던 사람이에요. 그 왜 주차장에서 소주 따라 주셨던…. 그럼 저희가 휴대전화로 영상 찍어서 보실 수 있게….”     


“아…. 여기 늙은이들 핸드폰으로 뭐 하는 거는 못해. 테이푸로 줘야지.”     


‘테이푸 마니아’이자 무형문화 보유자이신 어르신께 허락을 받기 위해, 한 달 전 A는 관객도 없이 썰렁한 우리 소리 축제 현장을 찾아 주차장에서 넙죽 그의 소주잔을 받아 든 적이 있다. 그때도 라디오 녹음이라고 다 말씀드렸는데 또 영상 타령을 하니 아무리 타령의 달인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한 것이 아닌가.     


“근데 지금 내가 감기에 걸려서 소리를 할 수가 없어. 감기 나으면 연락할게. 근데 테이푸로 줘야 우리가 볼 텐데.”     


그의 집엔 정말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을까. 어떻게 그게 여태 작동이 될까. 아니 이제 연세도 있고 하니 영상으로 당신들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다는 말씀일까. 아니면 거절하는 건데 말을 못 알아들은 걸까. 그와 전화를 끊고 또 한 달을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닌가. 기다리면 연락이 올까. A는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었다. TV, 스마트폰, 유튜브, 넷플릭스도 아니고 언제 봤는지 기억도 안 나는 비디오테이프라니.      


‘홀아비 얘기라도 할 걸 그랬나.’     


이래서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같은 민요 아이템은 안 한다고 했건만. 이미 위대한 콘텐츠로 완성한 것을 왜 다시 답습해야 하는가. 돈 준다고 다 해야 하나. 제작비 협찬을 받으려면 기존 콘텐츠에 빗대 설명하는 게 편하긴 하지만 문제는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A는 KO를 맞고 나가떨어진 복싱 선수처럼 엎드려 생각을 가다듬었다.      


내가 만들고 싶은 건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을 소리로 이해하고 그 소리를 이야기로 들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얘기해도 사람들은 ‘아~ 그거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라고 이해한다. 이러다 보니 이게 요즘처럼 소리가 사라지는 시대에 필요한 콘텐츠, 유튜브에서 인기 있는 에이에스 엠알(ASMR)이라고 백날 얘기해봐야 ‘그럼 요즘 듣기 힘든 문화재 같은 걸 라디오로 들려주면 되겠네!’라며 협찬을 해주는 것이다. 상대방이 이러면 안 한다고 할 수도 없다. 문제가 뭘까. 설명이 부족한 걸까. 온라인 시대에 맞는 새로운 라디오 콘텐츠를 만들어 보겠다고 헤맸는데 엉뚱하게도 시골 노인에게 KO를 당하고 A는 다시 피가 끓어오른다.     


맨날 똑같은 소리 보유하면 다인가. 그거 테이프 시절에 이미 다 녹음하고 영상 찍고 할 거 다 한 거 아닌가. 다음에 만나게 되면 어르신께 부탁하리라. 맨날 하는 모심는 소리, 새 쫓는 소리 이런 거 말고 테이프 타령을 해달라고 해야지. 라디오 타령도 해달라고 해야지. 맨날 똑같은 것만 하지 말고!     


이제 세상은 시골 노인 타령에 귀 기울이지 않지만, 라디오는 아직 당신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고. 당신이 ‘테이푸’를 사랑하듯 나는 라디오를 사랑한다고. 우리는 아직 들을 게 많다고.      

A는 유리창에 비친, 들썩이는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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