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기술자들

고추 말리기 대작전

by 봉봉

모든 게 다 있는 신도시에 없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골목길'일 것이다. 구도심 주택으로 이사를 오고 그동안 잊었던 골목길 풍경을 매일 마주하며, '그래, 나를 키운 건 골목길이었지. 우리는 모두 골목길 출신들이지.'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구불구불한 골목길. 이젠 인천 구도심에도 이런 골목길도 별로 남지 않았다.


(위 사진 ©유동현 인천시립박물관장, 인천 숭의동 109번지, 일명 전도관 동네)


요즘 골목을 걷다 보면 고추 말리는 모습을 마주하곤 한다. 긴 장마와 태풍 때문인지 작년보다는 고추 말리는 모습이 좀 줄긴 했지만, 해가 나면 고추를 너는 할머니들 모습은 여전하다. 어느 동네나 골목마다 고추 말리는 기술자들이 있다. 고도의 기술을 연마한 후에나 나올 법한 온갖 말리기 신공들이 골목마다 한창이다. 이것은 햇볕과의 사랑싸움이요 땅과의 혈투다. 할머니들은 해가 잘 드는 곳을 찾아 한치의 땅도 버림 없이 악착같이 고추를 말린다. 땅이 모자라면 아파트처럼 허공에 고추를 세우기도 한다. 한 땀 한 땀 장인의 손길로 고추를 어루만졌다. 이쯤 되면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라 해야 옳다. 비가 오면 집안에서 고추를 말린다. 겨울에도 잘 틀지 않던 보일러를 한여름 고추를 위해 아낌없이 튼다.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고추'가 뭐길래?


위 두 사진 ©강영희. 출처 http://www.incheon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4976
숭의동 109번지와 자유공원 아래 전동의 고추 말리기 풍경


정처 없이 골목을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무가 있거나 화분이 있는 곳에 발길이 닿는다. 골목에 정취를 더하는 것은 이런 식물들이다. 그런데 그중에 고추나무가 많다면 십중팔구 골목에 할머니들이 산다는 증거다. 고추는 할머니들의 상징이다. 할머니들처럼 고숙련 기술자가 아니라면 화분에 고추를 심고 말리는 작업을 해낼 능력자들은 없다. 올해는 고추 말리는 풍경이 예전 같지 않다. 안타깝게도 고추 기술자들이 점점 줄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옛 기억이 난다. 한여름 소나기에 후다닥 고추를 걷어들이던 엄마. 우유배달 일을 하던 엄마는 소나기가 오면 일하다가도 달려와 골목에 넌 고추를 거둬들였다. 거둔 고추는 일일이 물기를 닦아 집안에 발 디딜 틈 없이 널었다. 방바닥에도 선반 위에도 심지어 의자 위에도 고추가 앉았다.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고추가 먼저다. 시뻘건 고추 지뢰밭 사이에 겨우 발 디딜 곳을 만들었다. 발 조준을 잘 못해 고추를 밟았다가 등짝을 얻어맞기도 했다. 고추 냄새 때문인지 아파서였는지 눈물이 흘렀다. 눈물을 흘리며 엄마가 시키는 대로 고추를 반으로 갈랐다. 빨리 마르게 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다. 씨는 버리지 않고 따로 모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엄마는 나보다 고추가 좋아?"

"뭐라고?"


그때는 왜 나보다 고추를 그렇게 대접하나 했다. 고춧가루가 비싸기 때문이고, 이왕이면 집에서 잘 말린 깨끗한 고추로 빻기 위해서였다. 별 일도 아닌데 철이 들어야 아는 것들이 있다. 올해는 고춧가루 값이 그 어느 때보다 비싸다. 얼마 전 6Kg에 28만 원을 주고 샀다는 말을 엄마한테 들었다. 아파트에 홀로 계신 엄마는 옛날처럼 고추를 말리지는 않는다.


빠샤메카드 나찬이 넋을 잃고 고추가 만든 파노라마를 바라보고 있다 ㅎㅎ ©김경옥 제공


고추를 널고 햇볕을 쬐는 할머니들을 바라본다. 할머니들은 고양이를 닮았다. 고요함과 침착함의 상징. 햇볕을 좋아하는 다정한 이들. 한 치의 땅도 허비하지 않는 지상 최고의 기술자들. 악착같이 말은 파마처럼 악착같이 살아온 세월. 이렇게 여름이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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