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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 Jul 07. 2023

프롤로그

나자, 내겐 엄마가 있어

    내겐 마침표 없는 질문이 하나 있다.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의『나자』라는 소설은 “나는 누구인가?”로 시작한다. 내 질문도 그런 종류다. 엄마가 엄마를 낳아주신 엄마를 찾았다. 길러주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족관계를 정리하자고 하는데 낳아주신 엄마는 다른 가정을 이루고 계시고 그렇게 돌아가신다면? 내가 그 배를 베고 자고 그 김치 맛을 아는 우리 엄마인데, 함께한 모든 일 들을 기억하는 내가 사라지면, 엄마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걸 어떻게 무엇으로 알까?      

    나는 도서관 이용자다. 도서관에서 책이 가장 많이 나고 드는 화요일이나 금요일 봉사하곤 한다. 사서 보조 일도 시작했다. 책도 크기와 무게가 있는 물건이라 들고 꼽고 옮기다 보면 손목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다. 있는지 없는지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이 일을 나는 즐긴다. 일주일에 한 번은 훼손된 책도 고친다. 지금 모든 것이 가상공간으로 이사하고 있는 판인데 이런 일들이 무슨 소용이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이사가 끝난 것도 아닌데, 더욱이 다 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모두 다 이사 가려면 그래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실공간이든 가상공간이든 글자와 이미지가 있는 곳엔 사람들 사는 이야기가 담길 것이다.     

유일한 종족인 인류가 멸망 직전에 있다 해도 "도서관"은 불을 환히 밝히고 고독하게 그리고 무한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소중하고 쓸모없으며 썩지 않고 비밀스러운 책들을 구비하고서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르헨티나의 국립도서관장이기도 했던 보르헤스가 쓴 『바벨의 도서관』에서 읽은 말이다. 영원이라는 시간까지는 검증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천년을 간다는 한지만큼은 아니어도, 한 사람 산 생명의 시간쯤은 훌쩍 넘어 있을 수 있는 것이 종이고 책이다. 더구나 인류 태동 이후부터 지금까지 역사 자료보다도 몇 배 많은 기록이 디지털로 작성돼 인터넷에 남겨지고 한 번 인터넷에 기록되면 그야말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고도 한다.      

    우연한 어느 오늘, 나는 고민 끝에 도서관을 택했다. 책을 만들어 ISBN을 받아 도서관에 놓으면 보르헤스의 말처럼 시간 속 어디, 세상 어딘가에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는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글을 쓰기로 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 쓸 수 있는 건 뭘까? 다큐를 만들 수 있는 기자도 아니고 역사가도 아니고 소설가도 아닌 내가 쓸 수 있는 거라곤 ‘나’의 이야기밖에 없었다. 내가 가진 재료라고는 엄마와 나누는 이야기와 내 기억밖에 없고, 책밖엔 도움을 구할 곳이 없었다. 책의 세상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위로와 치유로 가득하다고들 하지 않는가?     

    얘기랄 것은 있기나 할까? 답을 찾아야 하는데 질문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운명의 과학』이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당신 기억의 생생함과 당신 기억의 정확도는 별개의 문제니 유의하세요.’ 시간을 돌릴 수 없는데 기억의 정확도를 어떻게 책임질 수 있단 말이야? 좌절하고 있을 때, 『가끔은 제정신』이라는 책을 읽었다. ‘사람들의 기억은 되살려질 때마다 거의 새롭게 쓰인다.’ 어차피 기억은 정확히 되살려지지 않는다는 사실, 하지만 기억하는 것 자체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말? 기억하는 것만으로 ‘나’라는 존재를 찾고 또 다른 ‘나’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바벨의 도서관』에서 보르헤스는 쓰고 있다.

   

     도서관이 모든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처음으로 나타난 반응은 무한한 행복감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완전하고 비밀스러운 보물의 주인이라고 느꼈다.     

    글을 쓰면서 나도 그랬다. 차츰차츰 그 ‘행복감’이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ISBN을 얻으려면 출판해야 하는데 그건 좀 막연한 이야기였다. 도저히 방법이 없다면 내 손으로라도 만들어야지 하며 나는 막무가내로 나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소설의 주인공 이름 ‘나자’를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다. ‘나자’는 ‘희망’이란 뜻을 가진 러시아 말의 시작, 단지 그 ‘시작’이라 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작가가 길에서 우연히 나자를 만나듯이 나는 도서관에서 책들과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빌어 나, 그리고 엄마의 이야기를 담아 보았다. 그 모양이 나자라는 이름처럼 그저 흩뿌려진 물감 같아서 무슨 그림이 떠올라 보일지 나조차 상상할 수 없다. 때론 에셔의 「손을 그리는 손」처럼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지키고 있기도 하다. 엄마하고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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