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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원인간 지니 Aug 06. 2022

질병분류번호 M32.9

병원인간으로 살아남기

“환자분, 무슨 일하세요?”

- 재수생이에요. 요 옆에 학원 다녀요.

“일단 학원 그만두시고, 치료에 전념하셔야 할 것 같아요.”


청춘의 시작이라 불리는 스무 살.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 잠자는 시간이 그저 아깝게 느껴지던 나의 스무 살. 나는 재수생이었다. 수능까지 딱 100일 남았던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학병원에 간 날. 의사는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상세 불명의 전신홍반루푸스' 국내에 환자가 20,000명 정도뿐인 희귀 질환. 완치라는 개념이 없는 난치성. 나는 단순히 손가락이 아팠을 뿐인데 하루아침에 희귀 난치성 질환자가 되었다. 학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울지 않았다.


학원은 그만두지 않았다. 다만 모든 순간 브레이크를 걸어야 했다. 스트레스가 가장 큰 적이라고 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던가. 모든 순간을 행복하게 웃으면서 살 수 있나? 있는 힘껏 살아가는 게 내 인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더는 예의를 차릴 수 없게 되었다.


대학에 갔다. 빨리 일이 하고 싶었다. 나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낼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이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작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내가 낼 수 있는 결과물이 작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더 빨리, 더 많은 일들을 해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회사에 갔다. 가면을 써야 했다. 사람들은 체력도 실력이라 했다. 남들보다 힘이 없었지만 제일 무거운 것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야 했고, 남들보다 빨리 피로해졌지만 제일 오래 일해야 했다. 해마다 골다공증 검사를 해야 하는 몸이었지만 남들보다 더 현장을 뛰어다녀야 했다. 아픈 사람과 일하면 피곤해진다는 선입견에 포함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야근하다 응급실에 가는 날이 잦아졌다. 나의 상태를 나도 예측할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환자분, 입원해야겠어요. 수치가 너무 안 좋아요.”

- 제가 회사에 다녀서 당장은 어려울 것 같아요. 약을 더 늘리고 상태를 보는 건 안 될까요?

“이번에는 부탁 좀 합시다.”


이 분야에서 명의로 꼽히는 할아버지 의사가 환자에게 부탁했다. 의사가 환자에게 부탁한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급하게 회사에 들어가 병가를 냈다. 이직한 지 일주일 된 회사. 대표와 직원들 모두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 나의 일도 예측할 수 없어졌다.


아등바등 살았다. 아니다. 삶은 늘 아등바등 사는 거니까. 나에게는 꾸역꾸역의 시간이 있었다. 어떻게든 모든 것을 집어넣으려고 애쓰는 시간에서 애를 태우는 시간을 살아왔다. 누군가는 나에게 헤르미온느 같다고 했다. 미래를 위해 사는 사람 같다고 했다.


다시 병원에 갔다. 이번에는 다른 곳을 치료해야 할 참이었다. 보통 사람과 같아 보이고 싶다는 욕심은 나를 또 환자로 만들었다.


‘선생님, 이제 죽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데 딱히 살고 싶지도 않아요.’


회사를 나왔다. 예측할 수 없는 몸으로 표준적인 노동을 제공하는 건 꽤 쉽지 않은 일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보통의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하는 노력을 함께 때려치웠다. 조직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없어졌다고 해서 몸이 안 아픈 것은 아니었다. 몸의 상태는 계속해서 예측할 수 없었지만, 증상에 대한 조치를 진두지휘할 수 있었다. 급하게 반차를 내고 병원을 찾는 일도, 병원에 가기 위해 월차를 아껴 써야 하는 일도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숨통이 트였다. 유병자가 조직을 벗어나서도 꽤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현실감이 너무 없어요. 요즘 제가 겪는 모든 일들이 꿈만 같아요.’

선생님은 오랜만에 찾아온 나의 말을 듣고 웃었다.




-

2019년, 첫 글을 발행한 이후로도 여전히 나는 내 병을 마주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2022년, 다시 용기를 내서 사회에 숨어있는 병원인간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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