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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원인간 지니 Aug 10. 2022

프로듀스 내인생, 병원인간으로 살아남기

그땐 철이 없었죠. 환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 줄 미처 몰랐죠

“진희 씨는 언제부터 몸이 아팠어요?” 


대화를 나누다 우연히 튀어나온 질문이 나를 잠깐 멈추게 만든다. 자,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 보자 언제였더라. 내가 처음 아프기 시작했던 것이… 라는 생각과 함께 상대에게 맞춘 답변을 생각하느라 잠깐 머리를 복잡하게 굴려본다. 진지한 질문이니까 진지하게? 아무렇지 않게 가볍게? 아니면 조금 장난을 쳐볼까? 그리고는 이내 가볍게 한 십 년 정도 되었어요.라고 가볍게 넘기듯 답을 한다.


글을 쓰는 지금도, 나의 길고 긴 질병의 여정을 어떻게 풀어내는 게 가장 좋을지 고민한다. 그리고, 이내 글을 쓰면 꼭 써보고 싶던 문장을 쓴다.


수능을 100일 앞둔 어느 가을날, 나는 환자가 되었다.

…라고 써보고 금방 다시 지운다.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극적으로 표현해보고 싶은 로망 아닌 로망을 다들 가지고 있지 않은가. 드라마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어, 라는 순간. 그런데 ‘당신은 환자입니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환자가 된 순간은 정말 하나도 극적이지 않았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세상이 떠나가라 울음이 나지도 않았다. 내 앞에는 일상이 있었다. 나는 그저 재수생이었고, 금방 돌아가 100일 뒤에 칠 시험공부를 해야 할 사람이었을 뿐.


환자 [명사] : 병들거나 다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 ≒ (비슷한 말) 병자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놀랍게도 나는 충치 치료를 위해 치과를 자주 가던 것 말고는 병원에 갈 일이 별로 없던 사람이었다. 그 흔한 독감도 한 번 앓아본 적 없는 어린이. 어렸을 때도 크게 아팠던 기억이 없는 사람. 가끔 두드러기가 나서 파우더를 텁텁 얹었던 기억들 정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열심히 놀고 대학이 나의 재기 발랄함을 알아주지 않았을 때 처음으로 사회의 벽을 알게 되었고, 재수라는 길을 선택했다. 재도전. 어감도 좋지 않은가. 다시 도전한다. 운 좋게 다시 도전할 기회가 있었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 수험생활이 끝나고 펼쳐질 행복의 세상에 대한 기대를 가득 담은 채로. 어? 문제가 풀리네? 어? 정답? 나 혹시 천재?라는 생각을 가득 얹어서.

새벽 6시에 일어나 학원 셔틀버스를 타고 자정이 되어서 집에 돌아와 내일 입을 옷을 골라놓고 잠이 드는 일상. 일상의 반복 속에서 작은 통증도 계속 반복되었다. 아침이면 연필을 잡은 손이 잘 안 굽혀지는 게 ‘공부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나의 마음’이 반영된 것만 같아 깊은 마음속 발언이 잠깐 몸으로 나오는 거라 생각했다. (재미와는 별개로) 몸도 공부를 거부하는군. 역시. 오전 몇 시간이 지나면 언제 아팠냐는 듯 부드러워지는 손가락이 그 근거였다. 놀랍게도 나를 병원으로 이끈 건 통증이 아니라 '질투'였다. 내가 펜을 잘 못 잡는 오전에 내 옆의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지고 있다는 느낌. 자꾸만 손의 통증에 집중하게 되는 게 싫어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증상도 미비하고, 누가 봐도 아프지 않은 모습에 학원 선생님도 반신반의하며 조퇴를 끊어줬다. 핸드폰도 만들지 않고 공부하던 그때. 전날 밤 인터넷으로 찾아놓은 학원 근처 정형외과로 가면서, 이 통증을 금세 가라앉힐 치료를 받고 모두 나을 거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작은 정형외과에는 할아버지 교수가 있었다. ‘크게 붓지도 않고, 아침에만 통증이 좀 있어요. 굽혔다 폈다 할 때요. 그런데 아침에만 그렇고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져요.’ 몇 가지를 묻더니 의사는 피검사를 하자고 했다. 아, 젠장. 잘못 왔구나. 정형외과에서 피검사라니. 내가 눈뜨고 코 베이는 중인 건가! 의사도 조치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작은 통증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간 진료실은 분위기가 사뭇 무거워져 있었다. 피검사에서 류마티스 인자가 나왔다. 쉽게 이야기하면 관절염인데, 큰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근처에 큰 병원은 어디가 있냐는 질문에 몇 군데를 불렀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대학병원에 가야한다고했다. 그렇다면 저는 코앞에 있는 저기를 가겠습니다.라고 말했고 근처에 있던 대학병원이 수신인으로 지정된 진료의뢰서와 함께 나는 병원을 나왔다. 대학병원이란 무엇인가. 하얀거탑 드라마에서 보았던 멋짐이 가득한 의사들이 가득한 곳 아닌가. 의술과 정치가 넘나드는 곳. 내가 태어나서 대학병원에 갈 일이 생기다니! 내 머릿속은 온통 대학병원에 ‘간다’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부모님께 카드만 받아서 나오는 치기를 불러일으켰다. 늘 그렇듯, 주인공들은 자신에게 닥칠 일을 하나도 모르고.


대학병원은 신기한 곳이었다. 띵동 번호가 불리면 진료카드가 손에 쥐어지고, 띵동 번호가 불리면 피를 뽑고, 다시 진료실에서 나를 부르고. 띵동, 띵동, 띵동. 순서가 정해진 곳에서 가만히 앉아 차례를 기다리면 모든 게 진행되는 곳. 이게 바로 시스템이라는 거군. 신기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별천지였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꽤 젊은 의사가 앉아있었다. 그는 몇 가지 질문을 했다. 환자분 지금 무슨 일을 하세요? 하루에 몇 시간 정도 자나요? 음. 그렇군요. 그의 처방은 간단했다. 일단 학원을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 같고요. 잠을 충분히 자야 합니다. 치료에 전념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무슨 병인데요? 심각한 병인가요? 저는 그저 손가락이 조금 아픈 건데요? 

“루푸스라는 병이 있어요. 아직 국내에 환자가 많지 않은 희귀 질환이에요. 환자분은 손가락에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증상이 나타난 거죠. 류마티스 관절염이랑은 다른 질병이에요.” 그렇군요. 그럼 앞으로는 약을 먹으면 되나요? “일단은 지금 증상이 엄청 심하지 않으니 약으로 잘 치료하기로 하고, 또 금방 봅시다. 자세한 건 밖에서 간호사가 해줄 거예요.”

난치병, 불치병, 희귀 난치질환자들을 위한 산정특례제도, 앞으로의 진료 예약, 결제와 처방. 무슨 말인지 정말 하나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흘러들어왔지만 제대로 소화해낸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약봉지를 한가득 품에 안고 병원을 나왔다.


환자가 된다는 기분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나는 지금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어이없음. ‘저 잎이 떨어질 때, 나도 생에 안녕을 고하겠지.‘라고 말했을 때 모두가 공감할만한 파리한 안색도, 온몸이 부서질 듯한 거대한 고통도 없었다. 그저 약봉지를 한가득 얻은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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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노약자석에 앉고, 아주 가끔은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서른 한 살.

대학교 입학, 졸업, 취업 그리고 퇴사까지 나의 의지만큼 의사의 소견도 중요한 몸을 가졌지만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 사람. 커리어와 함께 병명도 쌓여가는 삶을 살고 있다. 병원에 가는 것이 숨쉬는 것처럼 익숙한 사람이라 스스로를 병원인간이라 부른다.

늙음은 아픔이 용인되지만 젊음에게는 아픔이 용인되지 않는 사회에서 병원인간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천천히, 꾸준히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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