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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원인간 지니 Aug 21. 2022

나는야 나는야 합법적 약쟁이

10년, 매일 약을 먹어야만 하는 일상 속에서

오후 3시와 8시 두 번의 알람이 울린다. 조금 늦은 식사를 하는 중에도, 화장실에서도, 회의 중에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을 때도, 몸 눈치를 보며 맥주를 한 잔 따를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도. 알람 메모는 단순하다.

“약 먹어!!!!!”



루푸스를 진단받고 나는 학원을 그만두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내 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큰 증상이 없었다. 의사가 품에 안겨준 약들을 먹으니 증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으니, 나는 더 이상 환자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아침, 저녁으로 챙겨 먹는 스테로이드(*코르티코 스테로이드, 근력 향상을 위한 보조제로 사용되는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와는 다르다)는 나에게 기적의 약물이었다.


하루에 먹는 약은 5알. 의사는 다른 사람에 비해 면역력이 약하니 조금 더 조심하라 말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학교와 붙어있는 병원으로 옮기고 2년이 지날 때까지 나는 그 누구에게 말해도 ‘정말? 네가 아프다고?’라고 되물을 만큼, 나조차도 환자라고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잘 지냈다. 3개월에 한 번, 6개월에 한 번. 점점 멀리 만나는 병원이 그 증거였다. 그게 문제였을까? 약을 하루, 이틀, 일주일을 걸러도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몸이라 믿었는데 별안간 빨간불이 켜졌다. 소변에서 단백뇨가 나오기 시작했고, 의사 선생님은 신장 조직 검사를 권했다. 루푸스가 신장으로 침범해 단백뇨가 나오는 것 같다 했다.

아, 안일했다. 내가 너무 자신만만했구나.

관절염으로 시작한 증상이 루푸스 콩팥염(신염)까지 확장되었다 (출처: 보건복지부)

전신 홍반성 루푸스. 내가 앓고 있는 질환의 정확한 병명이다. 들어본 적 있는가? 당연히 없을 거다. 나도 진단받고 처음 들어봤으니. 최근 국내 환자 수가 급격히 늘고 있어 가끔 외국 배우 누가 앓는다더라, 국내 연예인 중에는 누가 그렇다더라 기사가 뜨곤 한다. 아주 가끔은 제약회사의 루푸스 치료제 개발로 주가가 반짝 급등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많아졌다고 해도 국내 환자 수가 5만 명도 안된다. (진단받은 당시에는 2만 명 정도였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국내에 인기 좋은 아이돌이 콘서트를 열면 이내 매진되는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을 다 채우지도 못하는 숫자. 그런데 진짜 문제는 여기 있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만큼이나 환자인 내가 내 병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것. 인터넷에 나오는 정보는 온통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되묻는 글들뿐이고, 어려운 의학용어와 논문들만 줄줄 나왔으니까.


루푸스에 대한 설명 (출처: 보건복지부)


자, 꾹 참고 다시 시작해보자. 루푸스란 무엇인가. 자가면역질환인 이 병은 한마디로 면역체계가 고장이 나는 거다. 차라리 고장이 나서 그냥 작동을 멈추면 차라리 나을 텐데 이 병이 의사와 환자들을 미치게 하는 이유는, 외부에서 들어온 병균을 공격하던 면역체계가 내 몸을 병균으로 인식해 자신을 스스로 공격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적군인지 아군인지 모르고 눈 질끈 감고 그냥 다 일단 공격 태세. 처음 손이 아팠던 이유도 내 면역력이 내 손가락 관절을 공격하고 있다는 시그널이었던 것이다. 병의 치료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면역억제제를 먹어 몸의 면역력을 0으로 만드는 것.


치료제 또한 단순하다. 스테로이드와 면역억제제의 복용. 몸의 염증을 줄이고, 몸의 면역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기적의 치료제가 불리는 스테로이드는 루푸스 치료를 위한 유일무이한 존재였고, 정말 말 그대로 기적의 치료제였다. 먹기만 하면 염증이 가라앉고, 몸의 통증이 사라진다. 문제는 효과만큼이나 부작용도 많다는 것이었지만. 그리고, 이 아름답고 무서운 기적의 스테로이드는 내가 병원인간이 되는 데 아주 큰 역할을 멋지게 수행해냈다.


루푸스 신염이 확인되고부터는 치료 방법이 바뀌었다. 일명 충격요법이라 불리는 공격적 투약으로. 하루에 1알, 많아야 2알을 먹던 스테로이드가 몸무게에 맞춰 최대 용량까지 늘었다. 10알. 고용량 스테로이드로 몸에 충격을 줘서 ‘이 자식아, 정신을 제발 차려라!’라고 혼쭐을 내는 거라는데 한참이나 치료받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정말 혼쭐이 나는 건 환자, 나 자신이라는 걸. 스테로이드 용량을 늘리고 얼마 되지 않아 머리가 술술 빠지기 시작했다. 얼굴은 아침이고 저녁이고 온종일 달덩이처럼 부어있었고, 살은 빠지지 않았는데 팔과 다리의 근육이 사라졌다. 잠에 잘 들지 못했고, 기분도 오락가락.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스테로이드 부작용이라는 건 원인을 찾기 위해 피부과, 관절재활의학과, 정신건강의학과를 거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원래 나쁜 짓은 쉽게 배운다고 했던가. 몸은 쉽게 나빠졌고, 또 아주 느긋하게 천천히 나아졌다. 스테로이드의 용량은 천천히 줄었고, 준 만큼 먹어야 하는 알약의 개수도 주는 것이 내가 아는 셈법이었으나 그 자리는 다시 다른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한 약으로 채워졌다. 못 참고 짜버린 여드름에 심술궂게 자리 잡은 여드름 흉터처럼 얄궂게. 내가 아는 수학 공식을 모두 틀렸다고 말하며.


오후 3시, 알람이 울린다. 알람 메모는 단순하다.

“약 먹어!!!!”


스테로이드 3알, 면역억제제 2알, 관절염 치료제 1알, 항생제 1알, 콜레스테롤 억제제 1알, 단백뇨 치료제 1알, 위 보호제 1알, 고용량 칼슘제 1알. 항우울제 1알. 12알의 알약을 손에 쥔다. 10년이나 먹었지만 하루에 두 번 약을 챙겨 먹는 건 정말 귀찮고 억울한 일이다. 약을 삼키며 오늘도 몸의 평화를 약속한다. 아, 물론 나 혼자만의 약속이다. 몸 친구는 나와 새끼손가락을 잘 맞대지 않는다는 것도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약을 먹는 행위 자체는 몇 초 걸리지 않지만 '약 시간'은 나에게는 하루 중 가장 힘든 순간 중에 하나다. '나의 약함(weaken)'을 깨닫는 순간. 매일 아침 때로는 점심, 저녁. 고통이 따를 때마다 때때로. 몇 개의 알약을 물과 함께 삼키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그 어렵고 복잡한 일을 잘 해내는 내가 약을 먹는 건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건지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약을 먹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 무간지옥처럼 느껴졌다. 무간지옥. 죽지 않고 고통이 영원히 지속되는 18지옥 중 가장 극심한 지옥. 몸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매일 겪어야 하는 고통.


분명 약을 삼켰는데 넘어가지 않고 목에 걸린 것 같은 느낌, 코끝에서 약 냄새가 사라지지 않고 헛구역질과 어지러움이 몇 날 며칠 계속되었다. 교수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에는 문제가 없는데….


선생님, 약 먹는 게 너무 싫어요.
약 먹을 때마다 진짜 도망가고 싶어요.
이걸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게 몸이 아픈 것보다
더 고통스러워요.


약은 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생긴건 나의 마음이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에서 약 먹기 싫다고 떼 쓰는 아이처럼 엉엉 우는 어른이 바로, 나였다.


내가 약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약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가 아니라, 약을 먹어야만 몸이 유지될 수 있다.'는 명제가 주는 고통이었다. 결국, 약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무간지옥이 나에게 또 다른 약을 가져왔다.


약을 먹는다는 건 스스로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불편한 순간을 불러오기도한다. 약을 먹는 행위가 병을 고백하게 되는 순간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병은 지금 고백하고 싶지 않더라도, 약은 지금 먹어야만한다.


그렇게 십 년, 이 무간지옥을 어떻게 빠져나왔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끝나지 않는 고통의 구역이라니까요? 아직도 알람이 울리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하던 일에 조금 더 집중하거나, 작은 한숨이 먼저 나온다고. 그런데, 지옥 속에서 아주 잠깐의 천국을 봤다고. 몸이 좋아질수록 먹는 약의 양이 조금씩 줄어드는 천국.


사람들 앞에서 약을 먹어야 하는 순간에 약을 이렇게나 많이 먹어?라는 질문이 자동으로 따라온다. 약을 먹는 걸 들키기 싫어 몰래 물 한 잔을 떠 후다닥 약을 삼키던 날들을 생각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능청스러운 표정을 꺼낸다. 몰랐어? 네 친구 약쟁이인 거? 멀리 연예계 뉴스 가서 찾지 마, 진짜 약쟁이가 더 가까이 있단다 친구야.


오후 8시, 이 글을 마무리 짓는 시간. 알람이 울린다. 알람 메모는 아주 단순하다. “약 먹어!!!!”


나에게 새끼손가락을 잘 보이지 않는 몸 친구를 힐끔 쳐다보며 면역억제제 두 알을 삼킨다. 야, 봤지? 나 오늘도 약속 지켰다. 너도 약속 지켜라. 여기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증인이다. 어?


_


오늘도 나의 약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직 다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끔은 노약자석에 앉고, 아주 가끔은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서른한 살.

대학교 입학, 졸업, 취업 그리고 퇴사까지 나의 의지만큼 의사의 소견도 중요한 몸을 가졌지만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 사람. 커리어와 함께 병명도 쌓여가는 삶을 살고 있다. 병원에 가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한 사람이라 스스로를 '병원인간'이라 부른다.

늙음은 아픔이 용인되지만 젊음에게는 아픔이 용인되지 않는 사회에서 병원인간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천천히, 꾸준히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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