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6.일요일 이야기
쏭 하우스 마지막날이다.
사실 처음부터 센터로스로 가도 되는데, 오자마자 혼자 있어야 하고 식사 관계가 애매해서 정말 잠깐 묵은 비즈텔인데, 그 새 자던곳이라고 금방 정이 들었다. 아침먹고 짐 싸서 기사님과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나왔다. 스카이 매니저님이 친절하게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어려워말고 연락 달라고 하시며 환송해주신다.
이사라고 해봤자 가지고 온 트렁크 세 개가 전부다.(골프백은 원래 차 안에 있었고) 뚝딱 실어 숙소인 센터로스로 향했다. 차가 커서 짐 싣기는 무척 편했다. 짐 옮기는 목적도 있고, 발전소 사이트 가는 길이 워낙 험해서 크고 튼튼한 차가 필요하다고 했다. 토요타 랜드크루저 프라도는 기아 모하비 같은 느낌의 차량인데 조금 더 크고 지상고가 좀 더 높은 듯 느껴졌다. 여기 현지에서도 고급차로 취급을 받는, 어디 가도 무시 안 당하는 차량이라고 먼저 온 경영팀장이 설명해준다. 파키스탄은 기본 생필품 소비재에 대한 세금도 비싼데(무려 17%), 고급소비재에 대한 세율은 판매가의 두배 세배 붙이는 것도 다반사라고 한다. 나라의 주요 산업이 내세울 게 없으니 거래세라도 걷지 않으면 정부가 돈이 없겠지. 못 사는 나라의 악순환이다. 중동처럼 나라가 돈이 많으면 기름이든 교육이든 대부분의 재화나 서비스가 공짜인 나라도 있는데.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그리고 내가 잘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 무척 다행이다라는 어쩔 수 없이 한심한 생각도 들었다. 나도 여기서 태어났으면 저들처럼 아무리 공부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냥 저들 중 성실한 직장인처럼 말도 안 되는 박봉으로 살 수밖에 없었을 터. 안타깝지만 내 능력으로 바꿀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야기가 살짝 샜는데, 차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하기로 하고(나는 자동차에 관심이 많다. 심지어 나는 국내 굴지의 자동차회사 연구원 출신이다.) 도로 집 이야기부터 하자.
센터로스는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이다. 세 개의 큰 타워가 있는데 A, B타워까지만 분양이 되고, C타워는 짓다가 망했단다. 껍데기만 있고 속은 텅 비었다. 주상복합타워 세 개에 호텔 건물까지 다 짓는 게 처음 계획이었는데, 뭐가 좀 잘 안 된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라마바드 시내에서 가장 크고 높은 건물 중 하나이며, 분양된 저층 쇼핑몰에는 사람이 항상 북적이는 곳이다.
많은 한국 파견 직원들이 이곳을 숙소로 고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이며 IS가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라 간간이 테러가 발생하며, 외국인(특히 중국인)을 향한 증오범죄도 일어나는 곳이다. 상대적으로 한국인에게는 악감정이 없다고 하지만 생긴 외모만 놓고 보면 우리도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구분이 힘든 게 사실인데, 이 나라 사람들이 우릴 알아보겠는가? 어쨌거나 파키스탄 자체가 외국인이 귀한 나라이며 상대적으로 표적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늘 불안을 달고 살 수밖에 없다. 이런 주상복합 아파트는 입구에서 무장 보안직원이 총과 실탄을 장착하고 24시간 지켜주기 때문에 외부 일반주택단지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2. 차량 이동없이 어지간한 건 해결 가능
말 그대로 주상복합 아파트이고, 저층에 있는 고급 상가단지가 무척 넓고 없는 거 빼곤 다 있다. 조금 비싼 것만 감수하면 은행, 식료품, 생필품, 옷, 안경, 환전, 가전, 외식 등 어지간한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 4층에는 그럴싸한 푸드코트도 있고 KFC 등 유명한 프랜차이즈도 보인다. 회사 제공 차량과 기사가 있지만, 매번 호출해야 하는 시스템이니 오는 사람도 부르는 사람도 부담스럽다.
3. 모이니까 모인다
대부분의 한국인 파견자들이 여기 있다 보니, 심적으로 의지도 되거니와 어디 이동하거나 모일 일이 생겨도 같이 있으니 무척 편한 게 사실이다.
다만, 아파트 특성상 거의 건물 안에만 갇혀 살게 되니 아이들 있는 가정집을 꾸리기에는 다소 갑갑하며 그런 이유로 외출이 자유로운 외교단지 내 주택을 구하는 파견자도 많다. 대신, 외교단지에서는 간단한 쇼핑에도 차량이 필요하며 단지 전체의 보안이 철저한 만큼, 음식 배달이나 메이드 서비스 같은 외부인 도움이 필요한 서비스를 쓰기가 무척 불편하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배정받은 아파트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보안요원이 금속탐지기 탐지를 한 번 거치고 입주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도록 되어있다. 아파트 실내는 유럽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별도의 현관은 없고 신발 신고 실내생활 가능토록 되어있고(물론 한국인들은 실내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거실과 주방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좀 특이해 보인다. 가족 이전을 염두에 두고 계약된 집이라 방이 두 개인데 나한테는 좀 많이 과하다. 원룸에 화장실이면 충분한데. 안내해주는 직원이 그냥 회사 사옥이다 생각하고 쓰는 게 마음 편하다고 팁을 준다. 어차피 계약된 거, 그래, 최대한 잘 써야지.
생긴 건 멀쩡한데, 연식은 좀 되어서 화장실 수전도 낡았고 드레인밸브도 여기저기 고장이고 조명램프도 몇 개가 안 들어오고 완벽하진 않았지만 나 하나 생활하는 데는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이 정도면 호사지 호사.
더불어 이슬라마바드 한 복판에서 몇 안 되는 고층건물이다 보니, 도심 전체가 한눈에 조망되는 조망권 최고의 주거지이다. 주말에 커피 내려 창밖 바라보며 마시면 까페가 따로 없겠다. 다만... 공기질이 워낙 나쁜 곳이라 훌륭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썩 기분이 좋을 것 같지는 않다...
뭐 아무렴. 정 붙이고 잘 살아야지. 2년간 내 집이 될 건데.
적당히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은 일찍 나가야 하는 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