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지사장 취임식. 2021.12.27.월요일 이야기
센터로스 와서 처음 자는데 밤 새 너무 몸이 안 좋았다. 열이 나고 오한이 들길래 얇은 패딩을 뒤져서 껴입고 잤는데도 추워서 죽는 줄 알았다. 사람이 오랜만에 들어와 사는 집이다 보니 난방을 틀어도 20도 이상으로 온도가 올라가지도 않았다. 밤새 못 자고 끙끙 앓았는데, 오늘은 이슬라마바드에서 AJ&K주에 있는 설비 현장으로 이동하는 날이다. 내 취임식이 있는 날.
다들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오자마자 행사를 미루고 병원 가자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약속된 새벽 6시 반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내려가니, 운전사 조니랑 헤드 매니저 두 분이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 조직장은 아프면 안 되지. 가다 보면 괜찮겠지. 가급적 아픈 티를 안 내고 태연하게 가려고 했다.
여기서 현장까지는 약 세 시간 반. 이동 거리는 약 120km 정도 되는데 워낙 길이 안 좋아서 달릴 수가 없다. 우리나라 60~70년대 시골실 생각하면 딱 맞겠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고, 도심 근교까지는 직선도로가 꽤 잘 닦여져 있는데, 지자체를 이어주는 도로는 정부도 지자체도 관심이 없어서 말 그대로 엉망이다. 포장도로이긴 한데, 곳곳이 파이고 누더기가 되어 살금살금 기어갈 수밖에 없도록 되어있으니 빨리 갈 수가 있나.
지사로 가면 갈수록 점점 지형이 험악해진다. 땅도 넓은 나라인데, 왜 굳이 이런 척박한 곳까지 와서 사람들이 살까. 다 이유가 있겠지. 이제 갈 때까지 울퉁불퉁하나 보다 했는데, 특정 지역을 넘어가니 도로가 확~ 좋아진다. 해당 지자체가 자기 구역만 관리해서 그렇다고 한다. 중앙 정부가 돈이 없으니 지자체 간 연결도로에 전혀 지원을 못 해주나 보다.
지사가 위치한 곳에서 조금 더 동쪽으로 들어가는 구역인 카시미르 지역은 아예 지도에 “분쟁지역”이라고 명기가 되어 있고, 심지어 인도와의 국경선도 없다(대충 점선이다). 발전소가 있는 지역은 AJ&K 지역으로 아자드 잠무 & 카시미르 지역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 지역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인 지역으로 AJ&K 관할구역으로 들어오면 호위차량이 선도한다. 나는 이 지역에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라 등록이 필요해서 여권을 보여달랜다. 이미 대기하고 있던 호위차량이 우리를 앞서 인도한다. 제복이 경찰처럼 보여 "꼭 경찰 같네요" 했더니, 진짜 경찰 맞다고 했다. 다만, 지사에서 필요해서 경호계약을 맺어 둔 상태로, 경찰 급여는 우리 지사 쪽에서 지급 중이라고. 국가공무원 급여를 민간회사에서? 뭐 좀 신기하긴 했지만 여긴 여기 룰이 있겠지. 어쨌건 호위차량이 앞서 달리면서 길을 다 열어준다. VIP 대접을 받는 건지 진짜 정말 위험해서 그런 건지 아직 구분이 잘 안 되었지만, 이제 현장에 가는구나 실감은 난다.
위험구역이라는 말과는 달리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광은 아름답다. 갈수록 산세가 험해지는데 중간중간 뷰 포인트는 마치 미국 그랜드 캐니언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기는 히말라야 산맥의 끝자락에 해당되는 곳이니 산세가 아기자기한 우리나라에 비할 것이 못 된다. 더불어 간간이 있는 마을과 시장 모습도 그냥 평화로워 보인다. 다들 다정하게 살면 참 좋겠구만, 왜 다들 싸우고 못 잡아먹어 안달일까. 저렇게 순박해 보이는 사람들인데.
열심히 달리고 달리다 보니 다 왔다. 지사 입구도 소박하다. 자그마한 “000 0000 Plant” 간판이 끝이다. 지사장 차량임을 알아보고 경비들이 거수경례를 붙여준다.
먼 길 왔으니, 숙소부터 가보자.
“지사장님, 저게 지금 짓고 있는 관사인데요, 작년(2021년) 초가 준공 예정이었는데 송구하게도 언제 다 지을지 기약이 없어요.”
관사는 지사에 있는 설비의 소유회사이자 사업추진 특수법인인 000사에서 발주하여 짓고 있는 건물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방법도 수단도 없다고 했다. 왜 관사가 늦어졌는지 물어보니, 코로나 탓에 봉쇄령이 내려 인부도 자재도 가져오기 힘들어서 그랬는데, 그 새 경제가 어려워져서 환율이 폭등하는 바람에 계약회사가 단가 맞추기 힘들어 추가 경비를 더 요구하고 있다고. 하지만 계약 원칙상 증액변경계약이 힘들어 서로 줄다리기 하다가 공사현장이 퍼져있다고 한다. 덕분에 관사 사용자가 될 우리만 노숙자 신세가 된 거다.
물론, 그렇다고 진짜 노숙하지는 않는다. 설비 건설 당시 건설인부들이 쓰던 임시 막사 같은 건물이 있다. 딱 봐도 누추하지만 그래도 잠잘 곳이 있는 게 어딘가. 오기 전부터 알고 온 사항이라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지만, 실제 와서 보니 생각보다 조금 더 안 좋다. 일단 너무 춥다. 바깥보다 방 안이 더 춥다. 뭐, 어쨌든 정 붙이고 살면 거기가 내 집이지 뭐. 간단히 짐만 풀고 도로 사무실로 향했다. 설비 현장이 넓어 숙소 역시 지사 구역 내 울타리 안에 있지만 걷기엔 좀 먼 거리로 차량으로 이동해야 했다.
사무실 건물은 설비동과 같은 건물에 있었다. 대부분의 유사시설이 그렇듯이, 옥상(=지상층)을 통해 지하로 들어가는 구조였다. 건물을 지키고 있던 수위는 화려한 정복을 입고 있었고 내가 차에서 내리니 발 구령과 함께 힘차게 경례를 해준다. 나도 손을 들어 거수경례로 화답했다.
내 사무실을 안내받았다. 입사 17년 만에 갖는 내 전용 집무실.
집무실 입구에는 “Plant General Manager”라 적혀있다. 별실 중 회의테이블을 갖춘 가장 큰 방이 내 집무실이다. 조금 우쭐해지려고 했는데 자리에 딱 앉으니 기분이 좀 상했다. 전임자 이름이 적힌 명패, 전임자 명함, 전임자 도장 등 내 자리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있다. 아니, 이런 걸 말을 해야 아나... 발령인사 명령지 뜬 지가 언젠데. 첫 출근과 동시에 얼굴 찡그리며 잔소리하긴 싫었는데 기분이 별로인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갑질은 안 되지만, 조직 운영상 최소한의 의전은 필요하지 않은가. 의전은 조직 지휘체계에 관한 권위를 부여하며 조직원의 충성심과 조직 전체의 위상 제고를 위해 공식적으로 필요할 때에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조직장을 위한 배려와 예우가 조금 부족하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기분 나쁘고 잔소리라 느껴져도 훈련이 필요하겠다 생각했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영역이니까.
물 한 잔 마시고 숨 좀 돌리고 있으니, 이제 취임식 준비가 되었으니 오라고 한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가야지. 첫 출근인 것만 해도 떨리는데 전 직원 모인 자리의 주인공이라니. 겁나고 긴장된다. 그것도 죄다 외국인 (사실 나 포함한 몇 명만 외국인... 다들 현지인.... 내 눈에 외국인일 뿐.) 아닌가.
취임식 장소인 회의실에 가니, 한 서른 명 정도가 빼곡히 앉아있다. 헤드테이블로 앉으라고 안내한다. 조직의 보스가 이런 느낌이구나. 사회자가 환영 멘트를 하고 현지인 수석 매니저들이 번갈아가며 환영 멘트를 하는데.... 솔직히 반도 못 알아듣겠지만, 대충 들으니 환영한다는 말 절반, 현지인들의 노력으로 지사를 잘 돌리고 있으니 우리 노고를 인정해주고 잘 도와달란 말 절반 정도 하는 것 같다.
나보고 한마디 하랜다. 휴... 우리말 취임사도 떨리는데 영어 스피치라니. 당연히 시킬 줄 알고 주말 내내 작문해 보았는데 머릿속이 하얘져서 기억이 안 난다. 그렇다고 꺼내놓고 읽자니 모양 빠지고. 적절히 단어만 살리고 적절히 곁눈질로 훔쳐보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시늉을 냈는데, 대충 80점은 한 것 같다. 첫 관문 무사히 통과. 휴....... 진땀이 난다.
내 취임식을 기념해서 뭐 먹을걸 잔뜩 준비했단다. 이 나라 사람들은 조그만 행사만 있어도 항상 먹을 것을 준비해서 나눠먹어야 한다고 헤드 매니저가 알려준다. 아... 나 오늘 아픈데. 배가 아픈데. 그렇다고 나 온다고 준비한 것을 내가 입도 안 대면 서운해할 테니 안 먹을 수도 없고 해서 가벼워 보이는 것만 집어 조금씩 먹고 있는데 현지 별식이라면서 보기만 봐도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소화하기 벅찬 음식들을 자꾸 나한테 권한다. 어쩔 수 있나. 사실대로 말해야지. 저기 죄송한데 제가 속이 좀...... 아, 첫날부터 지사장 모양 빠진다. 거듭 말하지만 조직장은 마음대로 아파도 다쳐도 안 된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다.
무사히 취임식을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와서 한국인 헤드 매니저들과 첫 미팅을 했다. 조직 구성, 현안, 주간업무계획 등등. 이제 실전이다. 아, 그런데 계속 배가 아프다. 인상이 자꾸 구겨진다. 티가 안 날수가 없다. 속이 탈이 나면 굶는 게 최선. 이상하다. 현지식도 안 먹고 물도 생수만 사 먹고 엄청 조심했는데 왜 그럴까. 그런데 주말 내 나랑 같은 식사를 했던 헤드 매니저 한 명도 자기도 속이 안 좋댄다. 아무래도 어제 점심에 먹었던 한국식 비빔밥에 들어갔던 생야채가 원인이 아닐까 추측되었다. 면역이 생긴 사람한테는 괜찮지만, 야채를 덜 씻거나 오염된 물로 대충 씻으면 탈 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원래 오후는 첫 업무보고가 계획되어 있었는데, 오한과 발열이 계속되어 일정을 취소하고 따뜻한 물만 마시며 안정을 취했다. 아흑, 괜히 해외에 온다고 했어... 아프니까 가족도 그립고 집에 가고 싶어졌다.
점심도 저녁도 일부러 굶었다. 열나고 설사 나고 급성 장염인 게 확실했다. 이 오지에 병원도 없고 약도 없고. 그냥 굶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숙소에 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끙끙 앓고 있는데, 헤드 매니저가 보건직원에게서 약을 받아왔다면서 먹어보랜다. 포카리스웨트 같은 맛이 나는 전해질 용액이다. 역시 챙겨주는 사람은 주변에 있는 한국 직원밖에 없다. 항상 잘 지내야지. 마음 다치게 하지 말아야지 다짐을 해 본다. 홀홀단신 해외근무인데 사실 실질적인 가족 아닌가.
내일이면 좀 낫겠지. 약도 먹고 했으니 나을 거야. 그렇게 현지 숙소에서 어색한 첫 잠자리를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