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3년 4월, 현지 Eid Ul-Fitr 연휴를 맞아 파키스탄 길깃 발티스탄에 있는 훈자 여행기를 비로소 탈고했습니다. 딸랑 3박 4일 다녀온 일정이라 일주일이면 다 쓰겠지 했었는데 보고 듣고 경험했던 게 많았던 터라 생각보다 에피소드가 길고 길어졌습니다. 프롤로그 에필로그 제외하고 본편만 27편이네요.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 여행기의 제1순위 고려 독자는 바로 접니다.
소중한 머리 속 기억을 저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외부저장장치를 이용하는거죠. 모든 순간을 사진과 영상으로 찍어 남길 수는 없지만 그 날의 감성과 기억을 글로 적어 남겨두면 다시 읽을 때 마다 연관된 기억이 새록새록 잘 떠오릅니다. 갔다와서 한 번, 글을 쓰면서 두 번, 읽으면서 세 번 네 번 여행하는 기분이 드네요.(또 그만큼 피곤해지기도 하고요. ㅋㅋㅋ)
그렇지만 저는 제 글이 많이 읽히길 바라기도 합니다. 한국인 중 파키스탄 훈자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은 (요즘에는 좀 많다지만) 여전히 소수이고,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 중 구체적인 여행기를 글과 사진, 또는 영상으로 남기는 분들은 그 중에서 또 소수잖아요. 저는 제 여행기가 파키스탄의 숨은 보석같은 아름다움을 알리고 양국 사람들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 기능하면 좋겠습니다. 실용적 정보를 얻어가시면 더 좋겠고요. 특히, 비행기 대신 카라코람 하이웨이 육로로 이동해야만 볼 수 있는 3대 산맥 합류지점 같은 곳은 제 글 말고는 한국어로 소개한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향후 그 곳을 방문하게 될 한국인들께 제 여행기가 많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저는 파키스탄에 살고 있는 글 쓰는 한국인으로서, 누가 아무도 시킨 사람은 없지만 글로써 파키스탄 생활정보를 공유하는 것에 막연한 소명의식과 의무감, 그리고 그에 대한 성취감을 좀 가지고 살고 있어요. 제가 글쓰기를 계속 하는 이유 중 하나이지요.
어쨌든 여행은, 기억을 무척 풍요롭게 합니다. 풍요롭고 다채로운 기억과 함께 내면의 세계가 엄청나게 확장됨을 느끼지요. 순도 100% 집돌이 성향인 제가 파키스탄 오지로 파견온 이후 깨우친 가장 큰 것 중 하나는 여행의 즐거움을 알게 된 거예요.
물론, 기본성향이 원래 집콕족으로 태어나서 집밖으로 나갈 용기를 내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매니아들은 여행을 계획할 때 가장 행복하다던데, 집콕족인데다 INTP형 성격으로 무계획 성향인 저는 사실 여전히 여행을 계획하기는 괴롭습니다. 마치 하기 싫은 숙제를 억지로 하는 그런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여행을 가 보면 너무너무 좋은 걸 이미 알고 있지요. 계획 세우기는 죽어라 싫지만 무계획 여행은 효율성도 떨어지고 위험하니 미루다 미루다 매번 마지막에 하고 있어요 매번. 사실 이번 훈자 여행도 사전에 목적지만 정하고 공부는 하나도 안 하고 가서 세밀하게 보고 왔으면 더 좋았을 법한 풍광을 몇 놓치고 왔지 뭡니까.... 늘 느끼는 거지만, 정말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같습니다.(알면서도 미리 공부하긴 싫어요...ㅠㅠ)
훈자는,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고산지대답게 스위스와 풍광이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물론 살고 있는 사람들 외모가 다르고 집 모양이 달라서 스위스 같은 맛은 안 나지만 뾰족뾰족 설산의 이미지와 깨끗한 공기만큼은 상당히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풍광 예쁘고, 공기 깨끗하고, 사람들 친절하고, 물가 싸고, 세상 어디에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절경도 많은 훈자. 그런데 한국인들에게 마냥 훈자 관광을 권하기는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 일단,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관광비자부터 받아야 입국이 가능하죠. 관광비자 받는거야 특별한 결격사유만 없다면 대부분 쉽게 받을 수 있으므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어요. 그런데...
- 이슬라마바드, 라호르 등 다른 대도시를 경유해서 국내항공편으로 갈아타고 길깃 공항까지 간 다음에 다시 육로로 이동하거나, 처음부터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통해 육로로 접근하는, 뭘 선택해도는 만만치 않은 여정을 각오하셔야 해요.
- 한국에서 파키스탄까지 최소 이틀(직항 자체가 아예 없어요. 1회 이상 환승이 기본). 가장 가까운 항공편인 이슬라마바드에서 길깃 공항까지는 하루에 딱 두 편(이마저도 자주 결항). 카라코람 하이웨이 육로 이동은 렌터카 운영 시 최소 16시간, 버스 이용 시 최소 24시간 이상이 걸리죠. 만일 이동 중 비라도 내린다면 이동에만 며칠이 걸릴지 기약할 수도 없어요...(낙석 등으로 자주 길이 막힙니다.)
- 그러니까 서울에 살고 있으면서 훈자 여행을 계획한다고 하면, 가는 데만 사흘, 오는 데 사흘 일정을 할애하셔야 해요. 일주일 여정으로 훈자를 올 수가 없어요.
- 길깃 발티스탄 주에서 테러가 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요(아예 없진 않습니다만...). 산악 트레킹 하러 온 외국인을 대상으로 총격테러가 있긴 했었는데 좀 지난 이야기고 훈자와 길깃, 스카르두 지역만큼은 비교적 안전하다고 알려진 지역입니다. 외교부 해외안전여행 여행경보지도를 살펴보면, 파키스탄 전역이 "적색경보", 즉 출국을 권고하는 지역인데 길깃 발티스탄 주의 딱 세 곳(훈자, 길깃, 스카르두) 지역만 "황색경보"-여행자제 지역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파키스탄 지역 대비 "상대적으로" 안전하단 얘기지, 여전히 안심하고 갈 수 있는 곳은 아니긴 해요.
- 낙석 및 산사태가 언제 발생할지 모릅니다. 사실 낙석 문제는 산악지형인 파키스탄 북부지형의 공통적인 문제입니다. 산을 끼고 있는 도로 중 안전해 보이는 도로가 별로 없어요. 낙석 및 산사태는 비 오는 당일이나 비 온 다음날 많이 발생하므로 날씨가 안 좋은 날은 정말 집콕하고 있어야 해요.
저런 치명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훈자에는 훈자에서만 볼 수 있는 절경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공기도 너무나 맑고 깨끗해요. 보이는 모든 것들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예뻐서 입에서 자연 감탄사가 나왔어요. 세상은 정말 넓고, 볼 게 많구나~ 하면서 말이죠.
개발도상국답게 물가도 매우 쌉니다. 괜찮은 숙소도 3~4,000 루피(1만 5천~2만 원)이면 하룻밤 묵을 수 있고 3~400루피(1,500~2,000원)면 든든한 한 끼를 먹을 수 있습니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젊은 배낭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높은 이유지요. 파키스탄 사람들은 외지자와 여행객에게 친절을 베풀라는 종교적 교리를 따라 그런 건지 기본적으로 외국인에게 매우 친절하기도 합니다. 유럽이나 북미를 여행하면 은근한 인종차별에 기분 나쁠 때가 있는데 여기선 "인종우대"를 받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매우 높은 확률로 현지인들로부터 "같이 사진 찍자"는 제안을 받게 되실 거예요.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훈자.
하지만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곳이 아닌 훈자.
한국인을 포함한 세계 사람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다 같이 즐기고 감탄하길 바라는 마음 절반과 관광객이 많아지면 결국 자연이 훼손되고 환경이 오염될 테니 지금처럼 접근성을 불편하게 하고 어렵게 만들어 오래오래 마지막으로 남겨진 신비한 관광지로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 절반이 왔다 갔다 합니다.
정말 아무런 기대 없이 떠났던 훈자 여행.
하지만, 너무나 환상적이고 황홀한 기억으로 오래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본 여행기를 즐겨주신 애독자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더 흥미진진한 글과 사진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