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침묵
내가 근무하는 곳에 역장은 두 역을 관리한다. 주로 역장실이 있는 곳에 상주하며, 오전과 오후에 들려서 업무 관련 지시사항을 얘기한고 간다. 역장과 1년이 넘게 근무했다. 안내센터 교대로 엇갈리면 상당기간 마주치지 못할 때도 많다.
지금은 관리자가 근무평가를 어떻게 줬는지 클릭만 하면 알 수 있게 됐다. 그래서 평가를 마치고 확인 기간이 되면 직원들의 표정만 봐도 평가 결과를 알 수 있다. '수''우''양'으로 등급이 매겨진다. 지하철에서 실적이라 부를 만한 게 딱히 없어서 연공서열에 앞서거나 또는 관리자와 코드가 맞으면 근무평가에 매우 유리하다.
난 차장에 진급하고 이 역에 발령받아 왔다. 이제 곧 3년이 된다. 7월에 다른 곳으로 발령이 예정 돼 있다.
3년을 근무하는 동안 지하철 50주년 스토링텔링 공모전 응모해서 '가작'을 받았다. 작년 연말에 직무 관련 사장표창도 받았다. 그러나 근무평가는 상반기도 '양' 하반기도 '양'을 받았다.
차장급에서 누군가는 '양'을 받아야 한다. 그래도 특별한 문제가 없는데도 꾸준히 '양'만을 주지는 않는다.
관리자도 미안해서 한 번은 '우'는 준다. 그리고 '양'을 주더라도 미안하다며 점심을 사주기도 한다.
아무리 회사 구성원으로 만났어도 인간미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쉽다.
어제 오후, 역장이 사무실에 와서 평소와 같이 업무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게시판에 붙은 직원 휴무계획표를 보면서 휴가 지원근무를 가지고 툴툴거렸다.
"5월은 이렇게 지나가네요. 6월은 이날 코 차장이 쉬어서 막내직원이 훈련을 못 받겠군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역장님, 6월이 지나고 7월이 되면 저는 발령 나서 갑니다."
무엇도 바라지 않는 표정과 말투로 당당하게 표현했다.
역장은 알 수 없는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제삼자가 바라보면 사이좋은 관계라 생각될 정도로 다정했다. 바로 역장이 지시한 업무를 하러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같이 있는 공기가 어색했다.
생존을 위해서 '양'을 벗어나기 위해서 김 차장처럼 일 했다고 단체방에 도배해야 했을까.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위화감을 주고 싶지 않다. 내가 관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행동은 거짓이다. 누군가의 평가로 인해 감정을 도둑맞고 싶지도 않다.
회사를 다니면서 누구보다 앞서가기 위해 몸부림쳤던 선배들을 많이 봤다. 지금은 내가 바라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도 있고, 관리자에게 이용만 당하고 그대로 있는 사람도 있다. 그분들도 이제는 퇴직을 바라보고 있다.
현재는 근무평가를 잘 받아서 역장 시험 대상자에 들어야 한다. 3년을 오롯이 '수'를 맞아야 한다. 하지만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난 되레 3년간 '양'들을 친구 삼았다. 위기는 기회다. 덕분에 다른곳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됐다.
'양'은 나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겨 주었다. 아직도 12년이라는 생존 기간이 남았다. 난 끝까지 이 회사를 발라먹을 것이다. 어제도 감사한 월급을 받아서 바로 5년간 해왔던 ETF를 매수했다. 생존의 계급이 아닌 생존의 그룹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사하다. 끝에 가서 실컷 웃어주자. 생존이 질투 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