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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의색 Oct 27. 2024

기침이 옮다.

1편

늦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한 씨의 희끗한 머리카락을 흩트린다. 낡았지만 깔끔히 손질된 운동화가 낙엽을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한 씨는 고요한 묘지를 바라본다. “영감님, 저예요.” 묘지를 두드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묻어났다.
 
  봄볕은 따스했지만 기억 속 최 씨는 서늘했다. 바람이 불어 그의 머리카락을 또 헝클었다. 한 씨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바람도 참 고집스럽네, 내 머리카락은 왼쪽으로 2대 8이라니까.”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는 최 씨를 닮은 바람 속에서 한 씨의 기억 속을 울린 것은 최 씨의 거친 기침 소리였다. 그리고 언제 닳아 없어질지 모를 것처럼 보이는, 낡은 나무 문. 오랜 시간 풍파에 시달린 듯한 그 문은 최 씨를 만나러 가는 첫 관문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좁은 골목을 휘감았다. 쌓인 눈이 녹물처럼 질척였다. 그 끝에 좁은 방 한 칸, 홀로 앉아 있는 최 씨의 입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카악, 퉤 쿨럭, 켁. 켁. 흠- 케엑. 퉤." 돌연 찾아온 기침에 휴지를 찾을 겨를도 없이, 그의 주름진 손바닥에는 누렇게 뜬 가래가 고였다.
 
  그는 힘겹게 손바닥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응어리진 한을 뱉어내기라도 하듯, 거칠게 기침을 했다. 손바닥에 떨어진 가래는 창백한 겨울 햇살에 더욱 누렇게 빛났다. 쓰러진 최 씨의 몸은 바닥에 흩뿌려진 가래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앙상하게 드러난 뼈마디, 잿빛으로 굳어진 피부는 그의 지난한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했다.    
 

 기침을 멈추지 못한 채, 최 씨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기침이 점점 더 심해지는군' 머릿속을 스치는 불길한 생각에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방구석에 놓인 약봉지가 눈에 띄었다. 며칠 전 약국에서 건네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방구석에 구겨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젠장, 그 약사 자식. 도대체 무슨 약을 준 거야?"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최 씨는 구겨진 약봉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쓰레기통은 이내 기침 소리에 묻혀 버렸다. "쿨럭, 콜록"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다. 약에 대한 불신과 절망감, 자신의 몸에 대한 패배감이 뒤섞여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흘러들어오는 겨울 햇살이 무색하게, 침침한 방안에서 최 씨의 기침은 멈출 줄을 몰랐다.     


 "똑똑똑." 삐걱이는 나무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경쾌하고 밝은 울림이었다. 마치 차디찬 방 안에 봄소식을 전하는 새소리 같았다. 그것은 분명 한 씨의 노크 소리일 터. 하지만 그 소리는 이내 쓸쓸한 적막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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