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출근만 두 시간 걸리던 파주로 첫 직장을 다닌 지 2년 반, 막차를 놓칠까 전전긍긍하던 야근 생활을 그만하고 싶어 사직서를 냈다. 이직할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니었고, 그저 계획은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캘리그래피를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6주 수업의 마지막 날, 수강생들이 자신이 쓴 손글씨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걸 고르면, 강사가 준비한 천 파우치에 인쇄해 기념품처럼 나눠주었다. 8년이 지난 지금, 수료증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파우치는 여전히 내 방 서랍에 오래된 보물처럼 들어있다. 파우치에는 내가 좋아하는 책 제목을 썼다. 마치 부적이라도 됐던 것처럼, 얼마 후 그 책을 출간한 출판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
영문과면 영어 잘하겠네?
라면 끓이는 법을 영어로 한 번 해보세요.
면접이 끝나고 마무리하는 분위기에서, 가볍게 던진 대표의 마지막 질문이었다.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이 질문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누가 봐도 나는 영어로 라면을 끓이다 말았고, 그 맛없는 라면은 회식 때 종종 좋은 안주가 되기도 했다. 호주에서 영어로 밥 벌어먹고사는 지금도 라면을 끓일 때면 가끔 그 질문이 생각난다. 영문과를 다니며 영어 과외 아르바이트도 했었지만, 누가 물어보면 차라리 국문과라고 얘기하고 싶을 만큼 사실 나는 영어에 자신이 없다. 영어에 알레르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1 지망이었던 국문과를 가지 못해 수능점수에 맞춰 2 지망 학교의 영문과를 들어간 것뿐이었다.
호주에서 만난 비영어권자 모두가, 그들이 호주에서 지낸 시간에 비례하는 영어실력을 갖고 있는 건 아니었다. 유창하거나 용감했다. 어떤 외국어가 되었든 똑같겠지만, 현지에 산다고 해서 영어가 일취월장하지 않는다. 공부하지 않으면 일상에 필요한 만큼, 혹은 일하는 데 사용하는 영어만 익숙해지게 되고, 나도 곧 그 수준에 꽤나 안정적으로 오래 머물게 됐다.
그러다 손님의 억지스러운 컴플레인에 맞서야 할 일이 생겼다. 잘 싸우는 성격도 아닌 데다, 한국말로도 (짜증은 내지만) 싸워본 적이 없는데, 화난 손님의 막무가내에 지고 싶지 않아서 그날 처음으로 ‘잘 싸우고 싶어서 영어를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억울한 상황은 만들지 말자고. 영어를 못해서 진 것 같았다.
이후로 ‘살면서 영어가 가장 쉬웠어요!’라고 할 수 있는, 뭐 그런 때는 아직도 오지 않았지만, 전보다 소홀히 하지 않게 됐다. 실력과 함께 여유와 눈치가 느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원서 읽는 속도가 빨라졌고, 손님 응대 스트레스가 덜해졌다. 그리고 점차 알게 됐다. 손님이 ‘Pardon?’이라 되묻는 이유가 내 영어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연세 지긋하신 손님의 청력이 좋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내 키가 작아서 190cm가 넘는 손님한테는 내 목소리가 작게 들렸을 수도 있겠다고. 그러니 영어가 맞았은지 틀렸는지 생각하느라 괜히 움츠려들 필요 없다고.
수많은 스타일의 영어가 공존하고, 각기 다른 영어실력을 가진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내가 가장 많이 배운 건 영어 표현보다도 그들의 태도였다. 개인의 서툼이 민폐가 되지 않는 여유로운 마음. 약자를 배려하는 문화와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 상대의 외적인 모습만으로 섣불리 평가하지 않는 시선들.
지금이라면 영어로 맛있는 라면을 거뜬히 끓이고 사이드 메뉴로 김치볶음밥까지 만들고도 남겠지만, 8,9년 전의 그 질문을 다시 받는다면, 솔직히 내 취향대로 ‘I don't like ramen that much, but..'이라며 가볍게 시작할 것 같다. 그때 내가 고민했어야 하는 건, 라면봉지 뒤에 쓰여있는 정확한 레시피를 생각해내는 것보다 그저 내뱉는 거였다. 으~ 이 영어 강박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