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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l 20. 2023

한치찜이 맛있는 건 한 치 앞도 몰랐지

제주 한치 먹물찜

  그냥 잤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금요일이라고 늦은 시간까지 안 자고 버티다가 쇼핑을 했습니다. 한치를 맛을 아는 사람은 한치철을 그냥 넘기지 못하지요. 손질해서 깔끔하게 진공 포장된 한치를 50마리를 덜컥 사버렸습니다. 식당 납품가(현재는 44,000원이라고 합니다만 현실은 모릅니다.)에 익일인 토요일 배송 보장이라 박스를 뜯고 냉동실에 차곡차곡 정리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결제 버튼을 눌러버렸지요. 

  몇 주 전 발행한 글에 썼다시피 저희 집에서 가장 '관리된' 미니멀라이프 존은 냉장고뿐입니다. 먹어야 하는 부담감이 드는 게 싫어 맛있는 재철 재료가 있다고 해서 냉장, 냉동고에 쟁여 놓고 산다거나 냉동 고등어,  냉동 갈치 등을 장기 보관하는 일도 없습니다만 곧 방학이라 춘기가 좋아하는 한치를 사두면 라면에도 넣어 먹고, 양념볶음도 해서 먹고, 버터구이도 해 먹고 이래저래 먹을 일이 많겠다 싶어 주문을 했지요.


  그런데 토요일이 지나고, 일요일이 지났는데도 한치가 오지 않습니다. 한치가 약속한 날에 오지 않을 줄은 한 치 앞도 몰랐습니다. 일요일 오후가 되어 배송상태를 확인해 보았는데 여전히 상품 준비 중입니다. 게다가 강풍이 불어 조업이 되는지도 걱정이 되었지요. 결국 주문을 취소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판매자는 5분 뒤 바로 취소해 주었지요. 말 한마디 없을 줄은 정말 한 치 앞도 몰랐네요. 있던 한치가 없어진 것도 아니고 오기로 한 한치가 사정이 있어 오지 않았을 뿐인데 뭔가 마음이 허전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로마트로 출동을 했습니다. 다행히 횟감용 한치가 서너 팩 남아있네요. 그중 가장 크기가 작은 것으로 담겨있는 팩을 하나 골랐습니다.


  오늘은 한치 먹물찜을 할 계획입니다. 한치 먹물찜을 만드는 방법도 제주 하귤을 먹는 법(여름엔 냉장고 속 시원한 하귤 (brunch.co.kr))처럼 말로 배웠습니다. 그래서 한치 먹물찜을 만드는 표준 매뉴얼 따위는 모른다는 이야기를 먼저 드립니다.


  여름밤이 되면 제주 앞바다는 한치잡이 배의 불빛으로 빛납니다. 중산간 지역에 살 때는 창문을 열고 바다를 내려다보면 마치 별빛이 내려앉은 것처럼 보입니다. 매일 보아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이지요. 전날 밤부터 새벽까지 어느 제주 어부의 노동의 대가로 한치를 살 수 있었습니다.

  한치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제일 작은 것으로 골라와서 몸통 길이가 제 손바닥보다도 짧습니다. 다리는 긴 다리 2개를 빼고는 짧아 오징어보다는 먹을 게 없습니다. 하지만 몸통이 부드럽고 연해서 아이들도 좋아합니다. 지금도 미식가인 둘째는 오징어만 먹다가 갑오징어 볶음을 먹고는 이렇게 맛있는 오징어가 있다니, 하고 감탄을 하더니 한치를 맛본 뒤로는 한치만 먹습니다. 


한치가 이렇게 맛있는 줄은 한 치 앞도 몰랐지!



제주 한치 @무지개인간

  


  사진 좀 찍자고 건드렸더니 색소세포가 반응합니다. 신기해서 노는 아이, 책 읽는 아이 모두 불러 구경을 시켰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한치 @무지개인간



  한치 먹물찜은 씻지 않고 그대로 찌면 됩니다. 그래도 집에서는 조금 편하게 먹고 싶어서 뼈만 빼고 찌려고 했는데, 뼈만 쏙 빼려니 손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먹물이 흘러나오길래 그만 포기하고 얼른 찌기로 했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뼈 빼고 눈 빼고 입 빼고 너무 깔끔을 떨었구나!' 생각하며 프라이팬에 종이포일을 깔고 한치를 나란히 눕힙니다. 이제 약한 불에서 뚜껑을 덮고 쪄주려고 합니다. 음, 저도 말로 배운 요리라서 시간은 모릅니다. 요리 동(ㄸ)손이시면 7분 정도, 그게 아니라면 적당히 찌면 됩니다. 너무 오래 찌면 질기니까 저는 한치가 빨갛게 변하고 3-4분 정도 더 있다가 불을 아예 껐습니다. 


한치 남매 @무지개인간


  통통한 먹물 한치찜이 완성되었습니다. 정말 맛있어 보이네요! 사실 이 맛도 아는 사람만 아는 맛입니다. 저도 이웃인 제주도민 언니가 도두동에 있는 횟집의 비밀 메뉴라며, 메뉴판에는 없지만 아는 사람만 주문할 수 있는 한치찜을 사주지 않았다면 맛보지 못했을 겁니다. 한치 통찜을 만드는 법도 배우지 못했지요.


한치찜 @무지개인간


  뼈를 빼려다 터진 먹물이 완전히 터졌어요. 가위로 싹둑, 싹둑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습니다. 


한치 먹물찜



잘라봐, 잘라봐, 알 있어?


  한치통찜을 가르쳐 준 언니가 뚜껑을 열며 가장 먼저 한 말입니다. 아마 알이 있는 게 제일 귀하고 맛있는 가 봅니다. 오늘은 네 마리 중 두 마리는 알이 있고, 두 마리는 없네요. 하귀 하나로마트 수산 코너 직원분은 아무래도 한치의 성별 감별에 뛰어난 능력을 지닌 분 같습니다. 그분에 한치 감별사일 줄은 한 치 앞도 몰랐네요. 덕분에 골고루 맛보게 되었어요. 다른 곳에서 샀을 때는 알이 하나도 없는 날도 있었는데, 앞으로 한치는 하귀 하나로마트에 가서 사야겠습니다.


한치 통찜 @무지개인간


  제주에 살아도 제주 막걸리는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은 제주 막걸리를 샀습니다. 그래야 더 맛있을 것 같아서요. 아, 역시 제주 막걸리는 도수가 높게 느껴집니다. 쌈장에 다진 마늘과 고추, 초장 조금, 참기름을 두른 양념장을 좋아하는데 오늘은 마늘과 고추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 아쉽네요. 깻잎과 상추는 왜 안 사 왔을까? 텃밭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어렵고 번거로운 요리는 하지 않는 저에게 간단하면서 특별한 한 끼가 되었습니다. 제주로 오고 첫 2년 동안은 지인들의 방문이 무척 많았는데, 여름에 오시면 적당한 크기의 한치를 사서 찜을 해드리고는 했습니다. 갑자기 한라산 소주잔을 기울이던 기억이 돋네요. 



  계절마다 제철 재료가 가득한 제주이지만 여름에 한치철에 맞춰 제주를 찾으신다면 제주의 한치 먹물찜도 즐겨보세요. 아름다운 제주 앞바다를 앞에 두고요.

  

  그리고 오늘 '한 치 앞도 몰랐다.'는 문장을 너무 과도하게 사용했죠? 그러게요. 저도 이렇게 많이 쓸 줄은 한 치 앞도 몰랐네요. 앞 일을 모르기 때문에 오늘 하루가 기대되고 설레길 빕니다.


  글 중간에 나왔던 다른 글 2편은 하단에 링크로 걸어두었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냉장고 안에 내 마음이 있었다 (brunch.co.kr)
여름엔 냉장고 속 시원한 하귤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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