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왜 그럴까?
주말에 이사를 했다. 한라산 중산간 동네에서 살다가 도심에 가까운 번화가로 주거지를 옮겼다. 어렸을 때는 이삿날이 다가오면 엄마와 아빠가 이불을 큰 이불 보자기에 넣어 묶고 최소한의 짐만 꺼내 놓고 살았는데 요즘은 포장이사가 대세라 처분할 물건 정도만 정리해 둬도 보따리를 접었다 풀듯 다섯 시간 정도면 보금자리를 쉽게 옮길 수 있었다.
이사를 하고 냉장고가 텅 비었다는 핑계로 나의 부엌은 휴업 상태였다가 이사를 한지 이틀 만에 쌀을 씻고 전기밥솥의 '찰진 밥' 모드로 밥을 지었다. 그리고는 감자, 양파, 당근을 꺼내 손질하고 돼지고기까지 깍둑 썰어 달군 냄비에 기름을 두르고 삭삭 볶았다. 단 이틀의 휴업이었지만 나의 요리 회로가 끊겼는지 생각나는 요리가 하나도 없었는데 마침 부엌 찬장 속에 있던 노란 카레 가루가 나를 저녁 메뉴 고민에서 구해주었다.
구수한 밥 냄새가 부엌을 너머 거실까지 새어 나오니 어느새 밥이 완성되었다. 보글보글 끓인 카레가 얼마나 맛있어졌나 뚜껑을 열었다가 뜨거운 김과 함께 풍겨 나오는 매콤한 카레 향에 입안에 침이 고였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카레 소스가 듬뿍 밴 감자를 쌀밥 위에 올려 잘 익은 김치나 총각무김치와 함께 먹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오늘은 김치통도 다 비웠기에 밥과 카레, 봄에 담근 마늘종 장아찌와 양하 장아찌가 저녁 메뉴의 전부다. 밥솥 뚜껑을 열고 주걱을 세워 열 십자를 그리며 살살 섞은 후 비벼먹을 수 있는 타원형 넓은 그릇에 밥을 떴다.
주걱에서 손목으로 전해지는 느낌이 어쩐지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찰기가 있는 밥을 좋아해서 밥물을 약간 더 잡는 편인데 오늘은 감을 놓친 느낌이 든다.
'아닐 거야.'
아직은 남의 집 같은 낯선 부엌에서 저녁 상을 차렸다.
"엄마, 혹시 햇반이야?"
"햇반? 왜?"
"밥이 좀 뭔가..."
설마 밥 짓기 경력 14년 차 주부인 내가 이틀을 손을 놓았다고 밥을 망치겠어, 했던 나의 의심이 맞았다. 밥은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설익은 느낌이 났고 '앙!'하고 입 안으로 들어간 밥알들은 개성 있게 입 안을 헤엄쳤다.
"밥이 좀 그렇지? 그래도 카레 넣고 비벼서 맛있게 먹으면 맛있어."
맛있다고 상상하며 먹어야 하는 그런 저녁밥을 먹었다.
그다음 날 저녁에는 찹쌀을 넣어 밥을 했다. 가을 날씨 탓인지 이전 집보다 건조한 실내 습도 탓인지 알 수 없으니 찹쌀을 넣고 물을 더 넣어 밥을 했다. 전기밥솥의 추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증기 기관차처럼 김이 빠지며 밥이 완성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밥솥 앞으로 달려갔다. 우리 아빠가 내가 지은 밥을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특히 밥물을 잘 맞추는, 나의 밥 짓기 경력에 연이어 덜 데운 햇반 같은 밥을 짓는 흑역사를 만들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찰진 밥을 성공했을 거야.' 이미 던져진 공 앞에서 주문을 외듯 생각한 후 밥솥 뚜껑을 열었다.
Oh My God! 오늘도 실패다. 찹쌀을 넣었지만 전혀 찰기가 없었고 생기를 잃은 밥만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의 원인 분석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물 양의 문제가 아니라면 이제 남은 것을 쌀과 전기밥솥의 문제였다. 물론 이사하기 전에는 찰진 밥을 뚝딱 만들어주었지만 기계라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고장이 날 수도 있고, 쌀은 온도와 습도에 더욱 예민하니까 이런 일은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릴 적 엄마가 해 주신 밥은 사계절 내내 찰지고 맛있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온기 담긴 아침밥을 먹고 학교에 갔던 기억은 늘 행복하게 남아있다. 내일 아침에는 엄마처럼 쌀을 30분 정도 불려서 밥을 지어봐야겠다.
저의 브런치를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브런치 글 중 가장 재미있는 글은 요가를 등록했는데 (brunch.co.kr) 입니다. 조금 귀여운 구석도 숨어 있어요. 지난 주까지는 약 먹으면 7일 (brunch.co.kr) 글이 가장 재미있었는데 아깝게 2위로 밀려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