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셀프 수선기>
주말 새벽 요가반을 등록했다. 집 근처이기도 했고 새벽이지만 7시 30분이라 부담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토, 일 새벽 요가반 모집'이라는 글을 보자마자 내 머릿속에는 7시 10분에 일어나 간단히 세수만 하고, 옷을 챙겨 입고 쪼르르 달려가는 그림이 그려졌다는 것은 말해서 뭣하리. 피드에 적힌 연락처로 문자를 보냈다.
무지개 인간님, 신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몇 안 되는 작은 모임 회원들과 원데이 요가 수업과 브런치를 신청해 두어 번 다녀온 적이 있어 나의 연락처가 입력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나를 기억해주고 이름을 불러주는 답장에서 '잘한 선택'이라며 만족해했다.
지난 주말로 요가 수업의 반이 지났다. 잠자던 나의 잔근육들은 여전히 자는 중이고, 많은 동작들은 여전히 어렵지만 요가 선생님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따라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요가는 처음 배우는데 상상하던 그 유연함과 길쭉함은 나와 거리가 멀지만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그러던 지난 일요일 딱 붙는 -나는 절대로 못 입을- 요가복을 입고 오시던 일요일의 선생님께서 그날은 조금 다른 스타일로 등장하셨다. 밝은 회색의 조거 팬츠에 모닝커피 빛의 브라운 맨투맨 티를 입고 오셨는데, 맨투맨 티는 오버핏에 아랫단을 잘라 돌돌 말려 있었다. 때문에 보일 듯 말 듯 보이는 선생님의 잘록한 허리는 더 가늘어 보였다. 게다가 해 뜨는 시간이 되니 붉은 태양빛을 받으며 몸을 폴더처럼 반으로 접는 요가 선생님의 모습은 황홀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명상을 잘 이끌어주시는 토요일의 요가 선생님이 더 좋았는데 오늘 아침, 일요일의 요가 선생님이 갑자기 분발하시며 그 인기를 넘어서는 순간이었다.
아침부터 허리를 180도 접는 사람들 틈에서 겨우 90도를 접고, 혼자 '오늘도 해냈어!'라는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왔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눈에 띈 맨투맨 티. 5년 전쯤 남편이 사준, 귀여운 푸들이 그려진 겨울용 기모 맨투맨 티였다. 작년에는 살이 쪄서 못 입었지만 올해는 많이 빠졌으니 분명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나 예쁘게 맞다. 선생님처럼 헐렁하고 풍성만 느낌은 없지만 그래도 15cm 정도 자른다면 잘록한 허리를 강조해 줄 것 같았다. 더군다나 마침 바로 옆에는 전날 밤에 아이들이 정리하지 않은 가위가 놓여 있었다.
슥, 슥, 슥, 슥, 슥...
요가를 마치고 집으로 온 지 5분 만에 이제 나도 선생님처럼 요가할 때 입고 싶은 맨투맨 티가 생겼다. 길이를 확인하기 위해 입어 보니 보일 듯 말 듯 느낌은 잘 살렸다. 돌돌 말릴 줄 알았던 자른 부분이 말리지 않는 것이 이상했지만 세탁을 하면 선생님의 옷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세탁기를 돌려 보기로 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치밀한 계획 따위는 없이 일어난 일이기에 저 옷은 모 아니면 도, 입을 수 있거나 버려야 하거나 일 것이다. 건조를 기다리며 약간의 후회가 밀려왔다. 그냥 뒀으면 겨울에 집 앞 편의점에 갈 때라도 입었을 텐데 멀쩡한 옷 하나를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건조가 끝났다. 옷이 나왔다.
돌돌 말리지 않았다.
이제 보니 오른쪽 왼쪽 길이도 달랐다.
밑단은 이미 쓰레기 분리수거장을 거쳐 저 어딘가에 있을 쓰레기 산으로 가 있기에 길이를 맞추는 방법은 더 짧게 자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더 자른다면 부끄러워서 영영 못 입을 옷이 될 것 같았다.
냉정하게 판단해야 했다.
귀여운 푸들 맨투맨 티와 헤어질 결심을 했다. 미련이 생기기 전 얼른 종량제 봉투에 말아 넣었다.
다시는 옷을 자르지 않겠다는 결심도 함께 했다.
입을 자신이 없는 보일 듯 말 듯한 옷은 보는 것으로 대리 만족하기로 했다.
이번 주에는 다시 눈을 감고 요가 선생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요가에 집중해야겠다.
3주차 요린이(요가 초보)의 이삿날에도 요가를 포기할 수 없는 이야기는 요가를 포기할 수가 없어! (brunch.co.kr) 에 있어요.
제 생각에 제 브런치에서 가장 재미있는 글은 약 먹으면 7일 (brunch.co.kr) 입니다.
daum 메인에 오른 다른 글이 궁금하시다면 삶을 정성껏 (brunch.co.kr) 도 읽어보세요^^